라이프치히에서 돌아온 생리학자,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보내고 끝까지 항전을 택한 마지막 총리
1938년 5월, 프랑코에게 내민 「13개 조항」. 스페인의 완전한 독립,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정부, 지역 자치, 양심의 자유, 토지개혁, 그리고 전쟁 행위에 대한 보복 금지. 프랑코의 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생리학자 출신의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정치인.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가 되어 세베로 오초아를 길러낸 실험실을 세웠으며, 1929년 PSOE에 입당해 1931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1936년 9월 재무장관으로 입각해 국립은행의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옮기고 이를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했고,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인 1937년 5월 총리에 올라 「저항이 곧 승리」를 내걸고 인민군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그가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에 의존한 것은 서방의 불개입 아래 무기를 살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었으나,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평생 받았다. 1938년 5월 「13개 조항」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고집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쿠데타로 그는 스페인을 떠났다. 1946년 PSOE에서 제명됐고, 2008년에야 당으로부터 복권됐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7–1939 정부·행정 · 스페인 공화파
경력 연표
- 1892카나리아 제도 라스팔마스의 부유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
- 1906–1915독일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생리학 수학, 1912년 의학박사
- 1922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 세베로 오초아를 배출한 실험실 창설
- 1929–1931PSOE 입당,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라스팔마스 선거구 하원의원 당선
- 1936.09라르고 카바예로 내각 재무장관 취임,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이송
- 1936.10금 준비 510톤을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 이른바 「모스크바의 금」
- 1937.05.17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 총리 취임: 「하나의 전쟁, 하나의 군대, 하나의 지휘」
- 1938.04–1939.03국방장관 겸임, 「저항이 곧 승리」 노선으로 에브로 공세 지휘
- 1938.05「13개 조항」 발표로 협상 시도, 프랑코가 거부
- 1938.09–10국제연맹에서 국제여단의 일방적 철수를 발표하고 바르셀로나 고별 행진 주관
- 1939.03카사도 대령의 쿠데타로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망명
- 1939–1945망명 공화국 정부 총리, 스페인 난민 구호기구(SERE) 조직
- 1946PSOE에서 제명 (2008년 당에 의해 복권)
- 1956.11.12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
관련 역사 사건
금 준비 이송과 그 논쟁
1936년 9월 13일, 재무장관 네그린의 주도로 국립은행의 금 준비를 마드리드 밖으로 옮기도록 하는 재무부의 비밀 명령이 서명됐다. 명령에는 정부가 훗날 의회에 책임을 밝히라는 조항이 붙었지만 그 조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14일부터 무장 경비 아래 금이 카르타헤나로 옮겨졌고, 10월 15일 네그린과 라르고 카바예로는 그 금을 다시 소련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0월 22일부터 사흘 밤에 걸쳐 상자들이 배에 실려 오데사로 향했고, 11월 5일 모스크바 국영보물창고에 예치되었다. 스페인 국립은행 금 준비의 72.6퍼센트에 해당하는 510톤이었다.
이 결정을 둘러싼 평가는 지금도 갈린다. 네그린은 프랑코의 아프리카 군단이 마드리드에 접근하는 상황에서 금을 안전한 곳에 두고 무기를 사려 했다고 했고, 라르고 카바예로도 불개입 협정으로 서방에서 살 수 없게 된 사정을 이유로 들었다. 반대로 같은 당의 아라키스타인은 소련의 강요를 의심했고, 이송이 국립은행의 재산권과 은행권 태환을 규정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누가 먼저 금을 국외로 보내자고 했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소련 측 접촉인 스타셰프스키의 제안이었다는 설과 네그린 자신의 발안이었다는 설이 함께 남아 있다. 1937년 2월 5일 최종 수령 문서는 금의 소유권을 국립은행이 아니라 공화국 정부에 두었고, 공화국이 금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으며 그 사용에 대해 소련은 책임지지 않는다고 정했다. 네그린은 1937년 2월부터 1938년 4월까지 19건의 매각 지시에 서명해 무기와 물자를 사들였고, 이 자금은 파리의 소련계 은행을 거쳐 각지의 구매에 쓰였다. 사료에 접근한 연구자들은 소련이 금 거래에서 부당하게 착취하지는 않았다고 보지만, 모든 비용과 수수료가 공화국에 청구되었다는 점, 환율 조작으로 무기 가격을 부풀렸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된다. 금이 소진되면서 공화국 재무부의 신용도 사라졌다.
네그린 사후에 남겨진 이른바 「네그린 문서철」은 이 논쟁의 결말과 관련된다. 그의 아들 로물로는 유언에 따라 금 운용에 관한 불완전한 문서 일체를 15년 넘게 넘기기를 거부해 온 끝에 프랑코 정부에 인도했고, 이는 금이 전액 전쟁 수행에 쓰였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망명 공화파 사회는 이 행위를 두고 깊은 상처를 받았으나, 프랑코 정부는 문서를 접수하고도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모스크바에 도둑맞은 금」이라는 선전 신화는 그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