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의회에서 핀란드의 전쟁 돌입을 선언하고 전후 전쟁책임 재판에 선 총리
1941년 6월 25일 저녁 의회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소련은 핀란드를 상대로 전쟁 행위를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핀란드은행 간부로 리스토 뤼티의 측근이 된 그는, 뤼티가 1940년 대통령에 오르자 총리로 발탁되었다. 재임 중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계속전쟁을 치르며 동카렐리야를 점령했고, 경제 문제보다 외교·군사 권한은 만네르헤임과 뤼티, 비팅 외무장관이 쥐고 있었다. 1942년 힘러 방문 때 "우리에게 유대인 문제란 없다"는 말로 핀란드 유대인 논의를 차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6년 전쟁책임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이후 정치에 복귀하지 않고 IOC 위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1–1943 경제·재정·계획 · 핀란드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12–1913세단뛰기 핀란드 선수권 2회 우승·국가기록 보유
- 1925–1933OKO(협동조합은행) 법률부장·전무이사
- 1937–1945핀란드은행 이사
- 1939–1940, 1943–1944핀란드은행 총재 권한대행·총재
- 1941–1943핀란드 총리 (계속전쟁기)
- 1938–1967IOC 위원; 핀란드 올림픽위원회 의장 (1961–1963)
관련 역사 사건
협동조합 신용운동과 은행 경력
랑겔은 하우호에서 태어나 1894년 10월 25일에 출생하였고, 1982년 3월 12일 헬싱키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변호사로 교육받았으나, 실제 경력은 협동조합 금융에서 시작되었다. 1925년부터 펠레르보 계열 협동조합운동에 속한 협동금고중앙대출기금(OKO, 오늘날의 OP 기업은행)의 법무부서장을 맡았고, 1933년 한네스 게브하르트가 사망한 뒤 그 기금의 전무로 선출되었다. 이 직책에서 그는 대공황기에 협동금고에서 자금을 빌린 농민들이 부채를 갚아나갈 전략을 구상하였으며, 다수의 정치 인사와 상업은행 경영진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37년 이 임무에서 핀란드은행 이사회로 소환되었고, 1939년 12월 겨울전쟁 중 리스토 뤼티 당시 총재가 총리로 이동하면서 총재 대행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전쟁 전부터 뤼티의 측근이었고, 뤼티가 대통령이 되자 총리로 발탁되었다. 랑겔은 젊은 시절 운동선수로 활동하며 세단뛰기에서 핀란드 선수권을 두 차례(1912년, 1913년) 차지하였고, 당시 17세 10개월의 나이로 가장 어린 남자 선수권 우승자였다. 1912년의 14.09m 기록은 당시 핀란드 신기록이었다. 이후 그는 핀란드 체조·체육연맹(SVUL) 회장을 1934~1945년과 1951~1953년에 맡았고, 핀란드 올림픽위원회 위원(1938~1967)과 위원장(1961~1963)을 지냈다. 1938년 헬싱키가 1940년 제12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같은 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핀란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IOC는 그가 전쟁책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위원 자격을 박탈하지 않았고,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할 때까지 1967년까지 위원직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총리 취임 이전의 랑겔은 협동조합 금융과 은행, 그리고 체육 행정이라는 세 영역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