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리안 베스테이로

Julián Besteiro

공화국 의회 의장 지낸 사회당 우파, 네그린 정부 전복하고도 마드리드에 남았다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 《마르크스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

베스테이로는 카를 카우츠키를 존경한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입 자체에는 반대했다. 다만 1919년 2월 베른 회의에서는 러시아의 경우를 예외로 인정하며 이를 옹호했는데, 뒤에 그는 러시아에서 문제된 것은 사회주의 독재와 무정부 상태 사이의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1923년 4월 12일 《엘 소시알리스타》에 실린 「민주주의와 독재」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사회주의 승리에 필요하다는 것은 곧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일 뿐이며, 그 때문에 기존 민주주의의 형식을 파괴하고 민주주의가 마련한 무기를 포기해 사회의 장래를 '다소 성실한 구원자들' 집단의 손에 맡기라는 것이 아니라고 썼다. 1933년에는 아마로 델 로살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사회주의를 세우려는 시도는 현 상황에서 불가능한 부조리이며, 실패로 끝나 반동을 자극할 뿐이라고 답했다.

1935년 4월 28일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라는 제목의 연설로 도덕·정치학 아카데미에 입회했는데, 이는 당내 카바예로 노선과의 갈등이 이어진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동시대 사상이 가장 반사회주의적인 형태까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서 파시즘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유사성을 분석했고, 집권한 사회당은 독자적 방향으로 경제 문제를 풀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또 하나의 부르주아 정당이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집권하지 못한 사회당은 폭력으로 권력에 접근해서는 안 되고 영국 노동당을 본떠 성숙한 정부 정강을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제2공화국 시기에 그는 양원제와 직능 대표로 구성되는 상원을 구상하기도 했다.

평가는 갈린다. 스탠리 페인은 그를 당내 유일한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볼 수 있다고 했고, 제럴드 미커는 '스페인의 멘셰비키'로 불렀다. 반면 폴 프레스턴은 도덕적 경직성에 발목이 잡힌 그의 마르크스주의 사상 기여가 매우 적었다고 본다.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는 그를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진화에 열린 교조주의자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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