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을 넘기고 살아남은 그루지야 내무장관
1952년 4월 베리야를 겨냥한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베리야의 손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베리야가 실각하자 측근들은 대부분 총살당했지만, 카라나제는 해임에 그치고 1970년 자연사했다.
베리야의 그루지야 출신 측근으로, 크림·다게스탄 내무인민위원을 거쳐 그루지야 내무장관(1943~1952)을 지냈다.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고, 베리야 측근 중 유일하게 처형을 면했다.
경력 연표
- 1935–1937트빌리시·시그나기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1크림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2–1943다게스탄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3–1952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2–1953‘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 이후 복권
- 1953그루지야 내무 부장관
- 1957–1970그루지야 각료회의 국가산림위원회 부의장
관련 역사 사건
밍그렐리아 사건 — 베리야를 겨냥한 숙청
1951년 11월, 스탈린은 그루지야 공산당과 국가보안 기관 내에 '밍그렐리아 민족주의 조직'이 존재한다는 고발을 접수했다. 스탈린에게 제보한 이는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 니콜라이 루하제였고, 그 배후에는 베리야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던 모스크바의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밍그렐리아 사건'은 실은 베리야를 겨냥한 우회 공격이었다: 베리야 자신이 밍그렐리아 출신이었고, 그가 지난 10여 년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부와 공산당에 심어둔 측근들이 대부분 밍그렐인이었기 때문이다.
1951년 11월 9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수사가 개시되었고, 이튿날부터 체포가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며, 그중에는 미하일 바라미야(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 아브크센티 라파바(전 내무장관), 콘스탄틴 브지아바(내무부차관) 등 베리야의 핵심 측근들이 포함되었다. 카라나제 역시 밍그렐인으로서 베리야의 직계 인맥에 속해 있었기에 표적이 되었다.
카라나제는 1952년 4월 8일 체포되었다. 루하제와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특별수사반(쩨프코프 반장 외 9명)은 냉·온 독방, 구타, 수면 박탈, 굶주림 등 고문을 동원해 '자백'을 받아냈다. 피의자들은 '튀르키예와 연계한 반소비에트 음모'를 꾸몄다고 진술하도록 강요당했으며, 수사 방향은 점점 '큰 밍그렐인'인 베리야를 향해 좁혀져 갔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베리야는 신설된 내무부(МВД)의 장관으로 복귀하여 3월 중순부터 이 사건을 재검토했고, 4월 8일에는 '밍그렐리아 사건은 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 루하제의 도발적 날조'라는 공식 결론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에 제출했다. 카라나제를 비롯한 생존 피의자들은 석방·복권되었고, 카라나제는 4월 10일 그루지야 내무부 차관으로 복직했다.
그러나 이 복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체포되고 12월에 처형되자, 그의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랐다. 라파바와 루하제 등은 '베리야 패거리'로 몰려 총살당했다. 카라나제는 10월 12일 예비역으로 전보된 뒤 12월 19일 '명예훼손 사실'을 이유로 해임되었으나, 기소는 면했다. 베리야의 측근 중 유일하게 처형을 피한 인물로서, 이후 1957년 그루지야 각료회의 산림위원회 부의장으로 복귀해 1970년 사망할 때까지 조용한 행정직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