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겐리호비치 바이노

Карл Генрихович Вайн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923–2022 ○ 자연사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1978–1988), 페레스트로이카를 거부하며 러시아화를 밀어붙인 강경파

에스토니아어를 거의 하지 못하고 짙은 러시아어 억양으로 말해 '예스토니안'이라 불렸다.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에스토니아어는 짙은 억양으로만 구사했다. 1978년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요하네스 케빈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어 극단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했고, 1979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 후 당 기구를 총동원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으나, 이듬해 6월 모스크바에 의해 경질되어 바이노 밸랴스로 교체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시베리아에서 자란 에스토니아인, 1978년 이전의 경력

칼 바이노는 1923년 5월 28일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태어나 노보시비르스크와 톰스크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하인리히 바이노(러시아식으로 게르니흐, 1889~1965)는 1917년부터 볼셰비키였고, 1917년 비루마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으며 1918년 에스토니아를 떠나 톰스크로 갔다. 어머니 리디아 사비는 20세기 초 시베리아로 이주한 에스토니아인 가정 출신이었다. 부모 모두 당원이었던 집안에서 자란 그는 1941년 톰스크 제3중학교를 졸업하고 노보시비르스크와 톰스크의 철도 운송 관련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해 철도 엔지니어 겸 전력기술자 자격을 얻었다.

1947년 그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고, 에스토니아 혈통이라는 이유로 에스토니아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9월부터 1948년 2월까지 타파 기관차 차량기지에서 기술자로 일했고, 1948~1949년에는 에스토니아 철도의 전기기술자이자 타파-나르바 선로 전기설비 구간 책임자였다. 이후 경력은 당 기구로 옮겨갔다. 톰스크에서 비슷한 전공을 공부한 알렉세이 뮈위리셉의 권유로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들어가 산업·운송 부서 강사와 중공업 부서 부책임자를 지냈고, 1952년 탈린주당위원회 서기, 1953년 5월에는 중앙위원회 산업·운송 부서 책임자가 되었다. 1957~1960년 에스토니아공화국 국민경제평의회 부의장을 거쳐 1960년 중앙위원회 서기로서 산업 문제를 맡았다.

그의 경력은 곧 볼셰비키 지도부가 에스토니아에서 충원한, 러시아에서 자란 에스토니아인 간부층에 속했다. 1950년 에스토니아공산당의 토착 지도부가 숙청된 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도 이들 계열이었다. 모어가 러시아어였고 에스토니아어를 억양 섞어 서툴게 구사했던 바이노는, 1978년 7월 26일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로 해임된 요하네스 케빈을 대신해 당 제1서기가 되었다. 모스크바는 그를 1978년부터 본격화된 러시아화 노선을 밀어붙일 적임자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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