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러시아 러시아 1881–1970 → 망명 · 뉴욕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려 나간 웅변가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반세기의 망명 — 파리에서 뉴욕까지

1918년, 여장 탈출이라는 소비에트의 조작된 이야기가 아닌 실제 경로로, 프스코프로 향했다가 몇 주간의 도피 끝에, 케렌스키는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에 도착했다. 내전 기간 내내 그는 볼셰비키도 백군도 지지하지 않았다. 양측 모두 러시아 민주주의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망명 신문 ≪드니≫(Дни)를 편집하며 ≪볼셰비즘의 서곡≫(1919), ≪대참사≫(1927), ≪자유의 십자가형≫(1934) 등 회고록과 역사서를 집필했다. 1940년 나치의 프랑스 침공으로 미국으로 건너갔고,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의 방대한 러시아 아카이브를 정리·연구하며 대학원 강의도 맡았다. 뉴욕에 정착한 뒤로도 라디오 방송과 공개 강연을 이어갔으며, 1967년 10월 미시간주 캘러머주 칼리지에서의 강연이 마지막 공개 석상이었다. 1970년 6월 11일 89세의 나이로 뉴욕 세인트루크 병원에서 사망했을 때, 뉴욕의 러시아 정교회와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의 프리메이슨 경력과 볼셰비키 집권에 대한 책임을 들어 장례 예식을 거부했다. 시신은 런던으로 옮겨져 무종파 묘지인 퍼트니 베일(Putney Vale)에 안장되었다. 끝까지 그는 1917년 2월 혁명의 민주적 약속이 배신당한 비극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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