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김정일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1–2011 ○ 병사

소련 출생 기록과 백두산 신화 사이의 후계자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17년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유일한 공개 육성이었다.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 공고화된 그는 1994년 김일성 사후 권력을 승계하여, 소련 붕괴 뒤의 고립과 경제위기 속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를 이끌며 17년간 국가를 통치했다.

경력 연표

영화광 독재자 — 신상옥·최은희 납치와 《불가사리》

김정일은 15,000편이 넘는 개인 영화 컬렉션을 보유한 열정적인 영화광이었다. 1966년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에 들어간 그는 영화예술과장을 맡아 조선 영화를 김일성 항일투쟁의 서사로 통일시켰고, 1973년에는 자신의 영화론을 집대성한 《영화예술론》을 출판했다. '종자론'을 핵심으로 삼은 이 저작은 주체사상을 예술창작에 적용한 것으로, 모든 창작을 단일한 사상적 토대 위에 두려는 시도였다. 이 책은 조선 영화 제작의 권위 있는 지침서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그의 후계자 권위를 문화적 영역에서 다지는 정치적 계기로도 작용했다.

조선 영화의 수준에 불만을 품은 김정일은 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1978년 홍콩에서 남조선의 전설적 감독 신상옥을, 반년 앞서 그의 전 부인이자 여배우 최은희를 납북시킨 것이다. 3년간의 수감 끝에 두 사람은 재회했고, 김정일은 이들에게 국제적 인정을 받을 영화 제작을 지시했다. 신상옥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돌아오지 않은 밀사》, 《사랑 사랑 내사랑》, 《탈출기》 등을 연출했고, 최은희는 《소금》으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결정판은 조선판 고질라를 겨냥한 괴수영화 《불가사리》(1985)였다. 철을 먹고 자라는 괴수가 농민들을 도와 폭정을 무너뜨리지만, 결국 농기구까지 먹어치우자 자신을 희생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많은 관객은 이 작품을 체제에 대한 은밀한 우화로 읽었다. 1986년 빈에서 영화 해외배급을 논의하던 중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조선 감시망을 벗어나 미대사관으로 뛰어들어 정치망명을 신청했다. 탈출 과정에서 최은희가 몰래 녹음한 테이프는 김정일이 직접 납치를 지시했음을 입증하는 최초의 음성 기록이 되었다.

1994–1998년, 고난의 행군과 선군정치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김정일은 이미 20년 가까이 후계자로 준비된 상태였다. 1974년 당내에서 후계자로 추대되었고, 1991년 12월부터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었다. 그러나 그가 물려받은 것은 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다.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로 연료·비료·수출시장을 한꺼번에 잃은 경제 위에 1995년과 1996년의 대홍수가 덮쳤다.

식량난과 아사가 잇따른 1990년대 중후반을 북한은 항일유격대의 시련에 빗대어 「고난의 행군」이라 불렀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인명 피해를 낳은 이 시기는 공화국이 겪은 가장 어두운 시련이었다. 김정일은 3년의 유훈통치를 거쳐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추대되었고, 1998년 개정 헌법 아래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국가를 이끌었다.

그가 내세운 통치 노선은 선군정치, 곧 인민군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삼아 위기의 국가를 지탱하는 방식이었다. 국제적 고립과 제재, 미국과의 핵 대립 속에서도 체제는 잇따른 붕괴 전망을 비웃듯 살아남았다.

2000년 6월 13일, 순안공항의 악수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평양 순안공항 트랩 아래에서 남측의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맞이했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마주 잡은 손이었다. 사흘간의 회담은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이산가족 상봉, 경제·사회 협력이 합의되었다.

선언 이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여러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이 뒤따랐다.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평양을 방문했고, 두 정상은 10·4 선언에서 종전선언 추진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등 더 구체적인 협력에 합의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현지지도의 길에 오른 열차에서 사망했다. 그가 열어 놓은 남북 정상회담의 선례는 2018년의 회담들로 이어졌다. 영화와 예술에 깊이 관여한 지도자, 그리고 가장 혹독한 위기의 시대에 체제를 지켜낸 지도자라는 두 얼굴이 그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2006년 10월 9일, 첫 핵실험

김정일 시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기 개발의 기원은 1980년대 영변 원자로 건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결정적 국면은 그가 권력을 승계한 1994년에 열렸다. 김일성 사망 석 달 뒤인 1994년 10월, 조선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다. 조선이 흑연감속로를 동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잔류하는 대가로, 미국은 경수로 2기 건설과 중유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합의는 2002년 붕괴했다. 부시 행정부가 조선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문제 삼자, 조선은 제네바 합의 파기를 선언하고 IAEA 사찰단을 추방했다. 2003년 1월 조선은 NPT에서 탈퇴했다. 이후 중국·미국·일본·러시아·남북이 참여하는 6자회담이 열렸으나, 근본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6년 10월 9일, 조선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지하 핵실험을 감행했다. 폭발력은 1킬로톤 미만으로 추정되었고, 일부 전문가들은 부분 실패로 평가했으나 조선은 세계 여덟 번째 공개 핵실험 국가가 되었다. 2009년 5월에는 더 강력한 2차 핵실험이 이어졌다. 김정일의 유산 가운데 가장 지속적인 것은, 고난의 행군과 국제적 고립 속에서도 조선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만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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