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차 포포비치

Коча Поповић

초현실주의 시인 출신 파르티잔 사령관, 티토-스탈린 결별 뒤 총참모장과 외무 장관을 지냈다

베오그라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학·철학을 공부했고, 1930년 세르비아 초현실주의 선언에 서명한 시인이었다. 1933년 비합법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들어갔고, 1937~1939년 스페인 공화국군 포병 장교로 싸웠다. 2차 대전 중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사단을 지휘했고 수체스카 전투에서 포위 돌파 계획을 세웠다. 1948년 코민포름 결의 뒤 총참모장이 되어 소련과의 대립 속에 서방과 군 현대화를 협상했고, 1953~1965년 외무 장관으로 비동맹 외교를 이끌었다. 1966~1967년 부통령을 지냈고 1972년 세르비아 「자유주의자」 숙청 속에 물러났다.

다른 이름: 콘스탄틴 포포비치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1948년 소련 군사 고문단 문제와 결별 뒤의 총참모장

1948년 3월 27일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편지는 소련 군사 전문가 철수의 책임을 유고슬라비아 쪽에 돌렸다. 편지에 따르면 소련 정부는 고문단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 뒤 포포비치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 군 지도자들이 소련 군사 고문의 수를 60퍼센트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편지는 그의 이름을 「코체 포포비치」로 적었는데, 공간자 주석은 이것이 원본의 오기이며 「코차 포포비치」가 맞고 그가 당시 유고슬라비아군 총참모장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세르보크로아트어 전기 기록은 그가 총참모장에 오른 것을 6월 코민포름 결의와 전임 총참모장 아르소 요바노비치의 죽음 뒤인 1948년으로 적는다.

결별 뒤 그는 1953년 1월까지 총참모장으로 있으면서 소련과의 대립 속에 서방 열강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현대화를 협상했다. 워싱턴과 펜타곤을 찾아 미국의 무기 원조를 얻는 데 중요한 몫을 했고, 그리스·터키와의 발칸 조약으로 유고슬라비아를 간접적으로 나토와 이어 소련의 개입에 대비했다. 1953년부터 1965년까지 외무 장관으로서 유엔 총회 대표단을 이끌었고,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적극적 평화공존과 비동맹 정책을 세웠다.

그는 공산당원이면서도 시장 개혁을 지지했고, 1966년 란코비치가 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실각한 뒤 부통령을 맡아 사회 전반의 자유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형식뿐임을 알고 이듬해 물러났고, 1972년 세르비아 「자유주의자」 숙청 속에 정치에서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