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러시아 카자흐스탄 1870–1918 ✕ 전사

「강한 손」을 자처한 장군

1914년 11월 야간 전투에서 코르닐로프가 직접 이끈 기습으로 오스트리아군 포로 1,200명과 함께 사로잡힌 라프트 장군: 「코르닐로프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오.」

카자크 병사의 아들로 태어나 총사령관까지 오른 입지전의 군인. 1917년 8월 소비에트를 부수러 수도로 군단을 보냈으나, 철도 노동자와 선동가들 앞에서 군대는 도착하기도 전에 녹았다. 내전 초기 백군 의용군을 이끌다 1918년 예카테리노다르 공격 중 포탄에 죽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7년 9월, 페트로그라드로 향한 진군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총사령관에 임명된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시베리아 카자크 출신의 강골 군인으로, 병사 소비에트와 이중권력을 혁명이 낳은 무질서로만 보았다. 그는 전선의 사형제 부활과 후방의 계엄을 요구했고, 우익 장교들과 자본가들은 그에게서 자신들이 바라던 「강한 손」을 발견했다.

1917년 9월 초(구력 8월 말), 코르닐로프는 크리모프 장군의 제3기병군단과 「야만사단」을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다. 케렌스키와의 막후 교섭이 파국으로 끝나자 이 이동은 공공연한 쿠데타가 되었다. 그러나 진군은 전투 한 번 없이 무너졌다. 철도노동자들이 병력 수송 열차를 지선으로 돌리고 선로를 뜯었으며, 전신노동자들이 명령의 전달을 끊었고, 소비에트가 보낸 선동가들이 병사들을 설득했다. 야만사단의 병사들마저 총을 내려놓았다. 크리모프는 자결했고, 코르닐로프는 비호프 수도원에 수감되었다.

쿠데타의 최대 수혜자는 볼셰비키였다. 수도 방어를 위해 무장한 적위대는 해산되지 않았고, 7월 사건 이후 투옥되었던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풀려났으며, 9월 중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처음으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다. 반혁명의 첫 칼은 오히려 혁명을 급진화시켰다.

1918년 4월 13일, 예카테리노다르 농가에 떨어진 포탄

1917년 12월(구력 11월 말), 코르닐로프는 비호프 수도원을 벗어나 테킨스키 연대의 호위 속에 돈 지방으로 향했다. 노보체르카스크에서 그는 알렉세예프 장군과 함께 백군 의용군을 창설했다. 남부 러시아에서 반볼셰비키 무장투쟁의 핵이 만들어진 것이다.

1918년 2월, 붉은 부대에 밀린 4천 명 남짓의 의용군은 얼어붙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얼음 행군」(제1차 쿠반 원정)에 나섰다. 코르닐로프는 이 절망적인 행군을 무자비한 규율로 이끌었고, 포로를 잡지 말라는 그의 명령은 내전 초기의 잔혹화를 앞당겼다. 3월 말 그는 쿠반의 수도 예카테리노다르(현 크라스노다르) 공격을 결정했다. 수적으로 몇 배나 우세한 붉은 수비대를 상대로 한 무모한 정면 공격이었다.

1918년 4월 13일(구력 3월 31일) 새벽, 강변 농가에 차린 그의 사령부에 포탄 한 발이 명중했다. 코르닐로프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지휘를 이은 데니킨은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서둘러 매장된 그의 시신은 도시에 진입한 붉은 부대에 의해 파헤쳐져 불태워졌다. 반혁명의 첫 칼은 부러졌으나, 내전은 이제 막 시작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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