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38년 6월 27일, 체포와 콜리마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1931년 모스크바의 반응추진연구그룹(GIRD)에서 로켓 개발을 시작한 개척자 세대였다. 1933년 8월 GIRD는 소련 최초의 액체연료 계열 로켓 GIRD-09를 쏘아 올렸고, 그해 통합된 반응추진연구소(RNII)에서 코롤료프는 부소장을 맡아 유익 비행체와 로켓 글라이더를 설계했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이미 소련 로켓공학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다.

대숙청은 이 연구소도 비껴가지 않았다. 소장 클레이묘노프와 랑게마크가 처형되고 발렌틴 글루시코가 체포된 뒤, 1938년 6월 27일 코롤료프도 「반혁명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구타 속에 조작된 혐의를 시인했고 10년형을 선고받아 콜리마의 말디야크 금광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괴혈병으로 이빨을 잃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이 아카이브는 이를 에두르지 않고 기록한다. 코롤료프의 체포는 무고한 것이었고, 대숙청이 소비에트 과학에 입힌 손실의 상징적 사례였다.

1939년 재심이 결정되어 그는 콜리마에서 소환됐고, 형기는 8년으로 감형되어 투폴레프가 이끄는 수감 설계국 TsKB-29, 이른바 샤라시카에서 복역하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Tu-2 폭격기 작업에 참여했고, 1942년 카잔의 로켓엔진 설계국으로 옮겨 글루시코와 다시 일했으며, 1944년 7월 석방됐다. 완전한 복권은 1957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는 이 세월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 일을 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57년 10월 4일, 익명의 수석설계사

전후 코롤료프는 NII-88 연구소의 장거리 미사일 수석설계사가 되어 독일 A-4의 복제에서 출발해 독자 설계로 나아갔다. 1957년 8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이 비행에 성공했고, 그는 이 로켓의 탄두 자리에 인공위성을 얹자고 정부를 설득했다. 1957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지구 최초의 인공위성이 사회주의 국가의 손으로, 그것도 20년 전 금광 수인이었던 사람의 설계로 올라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이름은 국가기밀이었다. 신문은 그를 다만 「수석설계사」라고 불렀고, 노벨위원회가 스푸트니크의 설계자를 문의하자 흐루쇼프는 「소비에트 인민 전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익명의 그늘에서 그는 최초의 생명체 탑승 위성, 달과 금성을 향한 탐사선, 그리고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까지 인류 우주시대의 첫 장을 연달아 써 냈다.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불같은 성미와 수인 시절의 조용한 상처를 함께 지닌, 설계국 전체를 홀로 끌고 가는 기관차 같은 사람이었다.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는 종양 제거 수술 중 숨졌다. 콜리마가 남긴 쇠약한 몸은 수술을 버티지 못했다. 이틀 뒤 프라우다는 전면 부고를 실었고, 소련 인민과 세계는 그제서야 「수석설계사」의 이름이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였음을 알았다.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장됐다. 무명 속에서 우주시대를 연 사람의 이름은 죽음과 함께 공개되어, 이후 소련 우주계획 전체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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