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5개년계획기의 계획 관료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경력 연표
- 1917–1921혁명과 내전기 당·군 행정에서 성장
- 1920s노동자농민검사와 최고경제회의 등 경제감독 기관을 거침
- 1930–1934고스플란 의장, 제1차 5개년계획기 지표와 공업화 행정 관리
- 1934–1935당·국가 경제 원로로 남았으나 이른 사망
- 1935 이후도시·공장명에 이름이 붙은 스탈린식 공업화 상징이 됨
관련 역사 사건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사마라에서 쿠이비셰프까지
쿠이비셰프 사후 1935년 사마라 시와 사마라 주는 그의 이름을 따 쿠이비셰프 시·쿠이비셰프 주로 개칭되었다. 1941년 10월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접근하자, 소련 정부는 쿠이비셰프를 '제2의 수도'로 지정하여 당·정부 기관, 외국 공관, 주요 문화 시설을 이 도시로 이전했다. 스탈린을 위한 지하 벙커도 건설되었으나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다. 1941년 11월 7일 혁명기념일 열병식이 쿠이비셰프 광장에서 거행되어 전시 결의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전쟁 기간 중 이 도시는 항공기·화기·탄약을 생산하는 주요 군수공업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폴란드군과 체코슬로바키아군 부대도 이곳에서 편성되었다. 사마라라는 역사적 지명은 1991년 1월 25일(쿠이비셰프 사망 56주기)에 회복되었고, 이는 소련 해체기 탈소비에트화의 상징적 장면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쿠이비셰프 저수지, 노보쿠이비셰프스크, 그리고 수많은 거리·광장·공장 명칭에 잔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