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글레 파레크

Lagle Parek

소련 교도소에서 걸어 나와 에스토니아 독립의 정치적 길을 연 반체제 건축가

1987년 8월 23일 정오, 히르베파르크에 아무도 없었다. 열두 시가 되자 2천에서 5천 명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파레크는 회고했다.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했어요.」

에스토니아 장교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건축가로 일하던 중 반체제 사미즈다트 활동으로 1983년 체포되어 4년간 수용소에 갇혔고, 석방 7개월 만에 MRP-AEG를 공동 창립해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했다. 이 집회가 발트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듬해 에스토니아 최초의 비공산 정당 ERSP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 회복 후 첫 내각의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1993년 풀라패 위기로 사임했고,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해 스탈린주의 희생자 추모비 건립을 주도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전후의 시민·종교 활동: 카리타스, 순례길, 그리고 기념비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파레크의 활동 중심은 정치에서 시민·종교 영역으로 옮겨간다. 에스토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1990년대 중반 가톨릭을 받아들였고, 1997년부터 자선 단체인 카리타스 에스티(Caritas Eesti MTÜ)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사회 구성원 겸 사무국장을 맡았다. 영어 위키백과도 그를 카리타스 에스티의 대표로 서술하며, 이 단체가 국제 가톨릭 자선 연합체인 카리타스 인터나티오날리스에 가입했다고 전한다.

그는 또 에스토니아를 가로지르는 순례길 조성에 참여했다. 에스티 키리크와의 2019년 인터뷰에서 파레크는 2012년 무렵 동료들과 함께 에스토니아 독립 100주년에 바칠 문화사적 순례길을 구상했다고 말한다. 이 길은 수도원이 있던 피리타에서 바스첼리나 주교성 폐허에 이르는 노선으로, 인터뷰에서는 600킬로미터가 넘는다고 소개되지만 여러 보도에서는 약 400킬로미터로 적혀 길이 표기가 엇갈린다.

그가 제기한 또 하나의 사업은 스탈린주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였다. 쿨투르 야 엘루가 에스토니아 메멘토 연합 회원의 이름으로 실은 글에 따르면, 기념비 건립 착상의 제안자는 ERSP 창립자 겸 의장을 지낸 라글레 파레크였다. 이 사업은 1989년 3월 25일 창립된 메멘토 연합이 희생자 명부를 작성하고 1992년부터 국가 예산 지원을 받으며 정리한 자료 위에 세워졌다.

기념비는 2018년 8월 23일, 에스토니아 공화국 수립 100주년이자 전 유럽의 전체주의 희생자 추모의 날에 탈린 마르야메에서 공개되었다. 같은 글이 전하는 금속 명판의 이름 수는 2만 2천여 명이다. 항목 요약이 전하는 대로 그는 이후에도 가톨릭 신자이자 피리타 수도원의 '수도원의 벗'으로 살면서 이 사업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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