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이크 라슬로

Rajk László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9–1949 ✕ 처형

내무장관으로 비밀경찰 ÁVH를 창설했으나 라코시의 첫 희생양이 된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재판의 국제적 각본과 숙청의 물결

1949년 5월 30일 체포 이후 수사는 처음부터 각본을 필요로 했다. 러이크는 처음에는 진술을 거부했고, 페테르 가보르가 이끄는 국가보안기관의 심문만으로는 기소를 뒷받침할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막힌 국면에서 라코시는 조언을 구해 모스크바로 갔고, 곧 소련 측 자문관들이 사건에 개입했다. 이들 자문관들은 물리적 폭력을 중단시켰지만, 사건의 방향 자체는 소련의 대유고슬라비아 노선에 맞추어 다시 짜였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공산당정보국에서 제명된 뒤, 티토와의 대결은 동유럽 각국에 충성의 시험대를 요구하고 있었고, 러이크는 그 시험대에 세워진 첫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혐의는 서방 제국주의를 위한 스파이라는 것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과의 내통으로 구성되었다. 기소장은 라코시 마탸시가 직접 작성해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고, 재판장은 여러 인민재판부 사건을 주재해 온 얀코 페테르였다. 재판은 1949년 9월 16일부터 24일까지 부다페스트의 금속·기계 노동자 노동조합 본부 대강당에서 열렸고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라코시는 집무실에 설치한 별도의 확성기와 전화선으로 심리 진행을 지켜보며 법정을 계속 지시했고, 피고인과 변호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압력을 넣었다. 기소된 사람은 러이크를 포함해 여덟 명이었고, 그중 러이크와 쇠니 티보르, 샬라이 언드라시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러이크 사건과 관련해 모두 15명이 처형되고 78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1949년 10월 15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 재판은 개인의 파멸로 끝나지 않았다. 러이크는 이미 라코시 체제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과 지하 저항운동, 그리고 국가보안기관 창설로 알려진 인물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유죄 판결은 체제가 그때까지 내세워 온 정당성의 근거를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을 기점으로 당 내부 숙청이 본격화되었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비난은 소련과 동유럽 각국이 유고슬라비아와 맺은 조약을 폐기하는 조치로까지 이어졌다. 탄압은 가족에게도 미쳤다. 아내 푈디 율리어는 5년형을 선고받았고, 아들은 시설에 맡겨져 '코바치 이슈트반'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자랐다. 1956년 혁명이 진압된 뒤에는 카다르 정권이 미망인과 아들 러이크 라슬로 주니어를 2년간 루마니아로 추방했다.

이 과정은 러이크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집행자였음을 보여준다. 그가 창설하고 감독한 기관이 그를 파멸시킨 심문과 법정을 만들어 냈고, 그의 재판은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 등지에서 반복될 일련의 쇼재판의 첫 사례가 되었다.

복권과 재매장(1955~1956)

스탈린 사후 탈스탈린화 속에서 러이크의 복권이 진행되었다. 안드레아 페퇴의 연구는 1955년 11월 공산당의 복권 결의를 언급하고, 영어 위키백과는 거듭된 시위 끝에 1956년 3월 28일 복권이 이루어졌다고 적는다. 라코시는 러이크의 유죄를 뒤이은 숙청들의 근거로 써 왔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은 이 복권 연설조차 그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석방된 미망인 율리어는 남편의 복권과, 생후 다섯 달에 '코바치 이슈트반'이라는 이름으로 시설에 맡겨진 아들을 되찾기 위해 싸웠다. 1954년부터는 남편의 공개 재매장을 요구했다. 페퇴는 이 운동이 너지 임레 그룹과 개혁파 지식인의 페퇴피 서클을 잇는 정치적 연결 고리가 되었다고 본다.

1956년 10월 6일 러이크와 함께 처형된 쇠니 티보르, 샬라이 언드라시의 유해가 다시 묻혔다. 참석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영어·러시아어 위키백과는 10만 명 이상이라고 적고, 페퇴는 35만 명이 관 앞을 지나고 묘지를 둘러쌌다고 쓴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당국이 공장마다 인원을 할당해 노동자를 조직적으로 보내게 했다고 전하며, 이 장례를 봉기 직전 가장 큰 공개 집회로 평가한다. 페퇴는 율리어가 최대한의 공개를 고집한 이 장례가 혁명의 심리적 예행연습이 되었다고 보았다. 헝가리 혁명은 17일 뒤인 10월 23일 시작되었다.

러이크의 정치·가족 생활과 재판, 처형, 재매장은 로버트 아드리의 희곡 『영웅들의 그림자』(1958)로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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