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리 이오시포비치 코간

Лазарь Иосифович Коган
소련 러시아 1889–1939 ✕ 처형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자 벨로모르 건설 책임자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백해-발트 운하: 굴라크의 첫 거대 프로젝트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코간은 백해-발트 운하(Belomorkanal) 건설을 총괄 지휘했다. 약 17만 명의 굴라크 수용자가 동원되어 227km 수로를 불과 20개월 만에 완공했으나, 공사는 거의 전적으로 삽과 곡괭이 같은 원시적 도구에 의존했다. 공식 사망자는 1만 2천여 명으로 집계됐지만, 역사학자 앤 애플봄은 실제 사망자가 약 2만 5천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굴라크 역사에서 최초의 대규모 강제노동 프로젝트였던 이 운하는 '계급의 적'을 노동으로 재단련시킨다는 소비에트 선전의 상징이 되었다. 1933년 7월 15일, 정치국은 코간을 비롯한 건설 지휘부 6명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같은 해 8월, 막심 고리키를 포함한 120명의 작가단이 운하를 방문해 『스탈린 백해-발트 운하』라는 600쪽 분량의 찬양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에서 코간, 피린, 베르만, 프렌켈, 라포포트, 주크 등 6명을 '각자 3만 명의 죽음을 뒤에 둔 용병 살인자'로 기록했다. 운하 자체는 수심이 3.5m에 불과해 대형 선박이 통행할 수 없었고, 경제적 가치는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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