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아르카디예비치 코스탄도프

Леонид Аркадьевич Костандов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5–1984 ○ 심장마비

브레즈네프 시대 화학화 계획을 지휘한 최장수 화학공업 장관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대화학 — 화학화 계획

코스탄도프의 경력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프로젝트가 있다면 그것은 '화학화(химизация)'였다. 1958년 5월 CPSU 중앙위원회는 '대화학(Большая химия)'이라는 비공식 명칭으로 불린 역사적인 전원회의를 열어 화학·석유화학 산업의 전면적 확장을 결정했다. 코스탄도프는 당시 국가화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당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 V. M. 부슈예프와 함께 이 프로그램의 설계와 추진을 주도했다. 초기 7년(1959~1965) 동안에만 90억 루블이 화학 부문에 투입되었는데, 이는 직전 40년간 투자 총액의 2.5배에 달했다. 1965년 화학공업부 장관으로 임명된 뒤로는 15년간 이 거대한 산업 확장의 최전선에 섰다.

화학화의 핵심 논리는 간단하면서도 급진적이었다. 금속·목재·천연섬유 등 전통적 소재를 더 가볍고, 더 저렴하며, 가공 에너지가 적게 드는 합성 소재로 대체함으로써 경제 전반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생산 확대에 드는 비용은 금속공업 확대의 100~150분의 1에 불과하다"는 코스탄도프의 주장은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실제로 1961년부터 1980년까지 화학·석유화학 부문에 약 580억 루블이 투자되었고, 이 기간 동안 화학공업 총생산은 10배, 플라스틱 생산은 14배 이상 증가했다. 1973년에는 광물비료 생산에서 미국을 추월해 세계 1위에 올랐고, 1980년대 초 소련은 석유 기반 화학제품 8만 종을 생산하는 세계 2위 화학 강국이 되었다.

이러한 성장은 서방 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코스탄도프는 외화 부족 문제를 '보상협정(компенсационные соглашения)'으로 돌파했다. 서방 기업이 플랜트와 기술을 제공하면, 완공 후 그 플랜트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아르망드 해머의 Occidental Petroleum과 체결한 암모니아 협정(1973년)이 대표적이다. 이 협정 하나로 연간 300만~400만 톤의 암모니아를 수출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톨리야티-오데사 암모니아 파이프라인(세계 최장, 2,400km)과 벤츠필스·오데사에 전용 항만 터미널이 건설되었다. 1960년부터 1986년까지 보상협정과 기술 도입으로 약 1,200개의 대규모 화학·석유화학 시설이 소련 전역에 세워졌으며, 총 도입액은 약 150억 달러였다. 1970~80년대 소련 화학 플랜트 장비의 50%가 수입산이었고, 이 설비들에서 폴리에틸렌의 90%, 폴리프로필렌의 100%, 암모니아의 78%가 생산되었다.

동시에 코스탄도프는 CMEA(경제상호원조회의) 틀 안에서 국제 분업도 정교하게 설계했다. 에너지 집약적 기초 화학은 소련에, 정밀 화학은 동독·헝가리 등 동유럽에 배치하는 식이었다. 동독과는 '폴리미르-50'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고압 폴리에틸렌 생산 설비를 공동 개발해 노보폴로츠크·숨가이트·톰스크와 동독 로이나베르케에 설치했고, 서독의 잘츠기터에도 라이선스를 수출했다. 코스탄도프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협상한 현장도 동독 라이프치히 박람회의 화학 플랜트 딜이었다.

그가 1984년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화학화의 추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만약 코스탄도프가 설정한 성장 속도가 유지되었다면, 오늘날 러시아의 화학 산업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러시아 화학계에서 나온다. 1990년대 이후 많은 시설이 방치되거나 해체되었지만, 오늘날에도 러시아 화학 수출의 90%는 코스탄도프 시대에 세워진 플랜트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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