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을 훔친 과학자-첩보원
"전쟁 전 정보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내가 과학기술정보과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엔 세 명뿐이었다. 모두 초짜였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 세계에 우리 요원은 고작 5~6명이었다."
화학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정보장교로, 과학기술 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940년 서방 과학저널에서 핵물리학 논문이 사라진 것을 감지해 소련 외국정보부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기안했고, 뉴욕에서 클라우스 푹스·줄리어스 로젠버그 등 맨해튼 계획 침투 공작망을 지휘해 쿠르차토프의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단축시켰다.
경력 연표
- 1938NKVD 5부(외국) 10과(미국) 선임작전장교
- 1939NKVD 5부 16과(과학기술정보) 부과장
- 1940NKVD/NKGB 과학기술정보과장
- 1943뉴욕 NKVD/NKGB 부주재관 (과학기술정보)
- 1945NKGB 1총국 11부 부부장
- 1947정보위원회(KI) 5총국 4부장
- 1954KGB 1총국 10부장
- 1963KGB 1총국장 자문그룹 선임고문
- 1966은퇴
관련 역사 사건
에노르모즈의 탄생: 1940년 원자력 첩보 지령
1940년, 과학기술정보과장으로 임명된 크바스니코프는 평소처럼 미국 과학저널들을 검토하다 한 가지 섬뜩한 변화를 감지했다. 1939년 우라늄-235 핵분열 연쇄반응 발견 이후 불과 수개월 만에, 저명한 핵물리학자들의 이름과 연구 논문이 모든 저널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인슈타인의 경고에 따라 핵 연구를 군사 기밀로 분류한 결과였다. 크바스니코프는 이 침묵을 단순한 출판 공백이 아니라 미국·영국·나치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돌입했다는 신호로 읽었다. 당시 그의 부서는 대숙청 여파로 겨우 세 명의 초짜 장교뿐이었지만, 그는 1941년 초 런던·뉴욕·베를린·스톡홀름·도쿄 주재 레지덴투라에 사상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발송했다. 이 지령은 각국 핵물리학 연구소 침투와 우라늄 폭탄 개발 정보 수집이라는 구체적 임무를 담고 있었으며, 소련 외국정보부의 '에노르모즈(Энормоз)' 작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1년 9월 런던 레지덴투라로부터 영국 우라늄위원회의 비밀 보고서가 입수되면서 그의 직감은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 이 정보는 1942년 3월 베리야 명의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한 특별보고서」의 근거가 되었고, 궁극적으로 스탈린으로 하여금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을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전환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