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게오르기예비치 멜니코프

Леонид Георгиевич Мель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81 ○ 자연사

스탈린 말기 최대 공화당을 4년간 통치한 우크라이나 제1서기

스탈린이 카라간다 탄광 증산을 명하자 멜니코프는 현지어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 「시장에 가서 노래하는 늙은 아킨을 찾아라. 그가 도와줄 것이다.」 아킨은 노래했고, 광부들은 일했다.

도네츠크 탄광 지대에서 성장한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한 뒤 카라간다 탄전 증산 임무를 완수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전후 복구와 서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척결 운동을 지휘했으며, 반유대주의 캠페인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흐루쇼프와 결별했다. 1952년 10월 확대된 당 중앙위 간부회의 정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6월 '민족정책 왜곡'을 이유로 해임되고 루마니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건설부 장관, 카자흐스탄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1966년부터 사망까지 15년간 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으로 일하며 산업 안전 체계를 정비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56.02 미재선

관련 역사 사건

1953년 6월 해임: 우크라이나 제1서기직 상실

멜니코프가 우크라이나 제1서기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1953년 6월, 스탈린이 죽은 지 석 달 남짓 뒤였다. 해임 사유는 경제 실적이 아니라 민족 정책이었다. 그는 「레닌-스탈린 민족정책의 조악한 왜곡」이라는 비판과 함께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책임이 물어졌다. 우크라이나 측 사료는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적는다.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밀어붙인 정책, 곧 교육의 급속한 러시아화와 이를 위한 인사 배치의 일방성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그는 당 중앙위 간부회 정위원 자격도 잃었다. 1953년 3월 정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내려앉았고, 6월에는 그 명단에서도 완전히 빠졌다. 스탈린 생전에 최대 공화당을 이끌며 최고 지도부에 오른 인물이, 스탈린이 사라진 뒤 몇 달 만에 당직과 당 기관 자리를 동시에 잃은 것이다. 이후 그는 루마니아 주재 대사로 나가게 된다.

이 해임을 1953년 3월의 당 기관 개편과 같은 사건으로 묶어 읽을 필요는 없다. 3월의 강등은 스탈린 사후 지도부 재편의 일부였고, 6월의 해임은 우크라이나 당·정책 노선에 대한 별도의 판단이었다. 두 조치가 겹치면서 그의 몰락은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해임 이후 그의 이력에서 당 기관 직책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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