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책임자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경력 연표
- 1958–1962주파키스탄 소련 대사관 통역·3등서기관
- 1962KGB 제1총국 입국, 101정보학교 훈련
- 1964–1968파키스탄 주재 KGB 정보장교
- 1971–1977주인도 KGB 부주재관 → 주재관
- 1979–1983주이란 KGB 주재관
- 1983–1987KGB 제1총국 정보분석국 부국장 → 국장
- 1987–1989KGB 제1총국 부국장 (중동·아프리카 담당)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1총국장
- 1991.8.22–23KGB 의장 대행
관련 역사 사건
테헤란 주재관: 이슬람 혁명 속의 KGB
1979년 5월, 셰바르신은 테헤란 주재 KGB 주재관으로 부임했다. 이란은 두 달 전인 2월에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귀국하여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앞둔 격변의 시기였다. 출발 전 그를 면담한 안드로포프는 "좌파 진보 세력이 집권할 가능성은 없으며, 이란인들이 신정 체제에 환멸을 느끼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실제로 멀라들의 통치는 그 예측보다도 더 오래 이어졌다.
테헤란 임무는 곧바로 시험대에 올랐다. 1979년 11월 이란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3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잡으면서 소련 대사관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셰바르신은 사전에 모든 비밀 문서를 폐기하고, 이란 지도부 내 온건파에 "소련 측의 단호한 대응" 가능성을 전달하여 외교 공관에 대한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란 여론을 급격히 악화시켰고, 1980년 12월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테헤란 주재 소련 대사관에 난입해 1943년 테헤란 회담이 열렸던 역사적 건물의 창문과 집기들을 파괴했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1982년 6월 소속 장교 블라디미르 쿠지치킨이 영국 정보기관 MI6에 망명하면서 닥쳤다. 쿠지치킨은 불법 첩보를 담당하는 KGB 'S국' 소속으로 이란 공산당(투데당)과의 연계 요원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의 배신으로 이란 체제는 투데당 지도부를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당 서기장 누레딘 키아누리를 포함한 수백 명이 공개 재판에서 소련을 위한 간첩 행위를 강요당하며 자백했다. 셰바르신은 후일 이 사건에 대해 "그가 입힌 피해는 심리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하면서도 부하의 망명이 자신의 경력에 치명상을 입힐 뻔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1983년 2월 이란을 떠날 무렵, 셰바르신이 이끈 테헤란 주재부는 이슬람 혁명과 국제적 고립, 소련-이라크 관계로 인한 적개심 속에서 소련 정보망을 유지해야 하는 극한의 현장이었다. 그 경험은 훗날 KGB 대외정보 최고 책임자가 되는 그의 대중동 인식의 근간을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