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예피모비치 마랴신

Лев Ефимович Марьяс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38 ✕ 처형

스탈린이 '우리의 붉은 은행가'라 부르고서 일주일 만에 내친 고스방크 총재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해임에서 복권까지: 체르카시 건설 현장과 레포르토보, 그리고 1956년

1936년 7월 14일 스탈린 면담 뒤 해임된 마랴신은 곧바로 새 자리를 받지 못했다. 그의 집무실은 점토 인장으로 봉인되었고, 부하 직원들은 전 상사를 피했다. 그는 스탈린에게 회의를 요청하는 편지를 두 번 보냈고, 8월이 되어서야 일자리를 얻었다. 1936년 8월부터 12월까지 그는 키예프주 체르카시 통조림공장 건설 현장의 책임자로 일했다. 고스방크 총재와 재정부인민위원을 지낸 인물이 지방 공장 건설 현장으로 밀려난 것이다.

1936년 12월 20일 체포되었다. 1937년 9월 10일 소련 최고군사재판소는 그에게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총살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 집행은 거의 1년 뒤인 1938년 8월 22일에야 이루어졌다. 이 지연은 수사 기록이 말하는 바와 맞물린다. 레포르토보 감옥에 수감된 마랴신은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자백이 끝난 뒤에도, 수사가 종결된 뒤에도 계속 구타당했다.

사후 처리는 1956년에 왔다. 1956년 5월 30일 소련 최고군사재판소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그의 형제 알렉산드르 마랴신도 같은 운명을 걸었다. 도로고밀로프 화학공장장이던 형은 1936년 11월 20일 체포되어 1937년 5월 26일 총살되었고, 1956년 7월 7일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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