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 공장 견습공에서 군산복합체 총괄 정치국원이 된 테크노크라트
위대한 조국전쟁 중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서던 열여덟 살 자이코프는 세 차례 전선으로 도망쳤다. 매번 공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방산 노동자로서의 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으로 출발해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5–1990)까지 오른 산업 관료 출신 당 지도자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방위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핵·재래식 무기 감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소련이 금지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했고, 방산 전자기업 노바토르와 레니네츠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총책임자까지 오른 공장 경력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1971) 칭호를 받았다. 이념보다 실무를 중시한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지도자였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0 산업·생산 운영 · 소련 · 중공업 · 군수공업
경력 연표
- 1940–45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자물쇠공, 3차례 전선 탈출 시도
- 1961–71레닌그라드 국영 '노바토르' 공장장
- 1974–76과학생산연합 '레니네츠' 총책임자
- 1976–83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 1983–85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85–90중앙위 서기(군수공업·기계제조 담당), 정치국 위원(1986–90)
- 1987–89모스크바 시 당 제1서기 (겸임)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86.03–1990.07
1990.07 미재선
관련 역사 사건
비밀 생물무기 프로그램 총괄과 노출 관리
군수공업을 총괄하는 정치국 위원으로서 자이코프는 소련이 생물무기협약을 위반해 비밀리에 운영하던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다. 이 프로그램은 표면상 민간 조직인 '비오프레파라트'를 통해 운영되었고, 자이코프는 그 존재를 완전히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89년 7월 27일 그는 중앙위 사무실에서 외무장관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총참모장 미하일 모이세예프 등 열여섯 명의 고위 인사를 소집했다. 안건은 다가오는 화학무기금지협약과 그에 따른 현장 사찰 의무가 노출 위험을 얼마나 키우는가였다. 1990년 5월 비오프레파라트의 고위 연구자 블라디미르 파세치니크가 영국으로 망명하고 영국과 미국이 외교적 항의를 제기하자, 자이코프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에게 서한을 보내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과 파세치니크의 폭로가 끼칠 손실을 평가했다. 이 서한은 파세치니크가 좁은 분야의 전문가이므로 과학기술적 성과가 광범위하게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소련의 협약 준수 여부에 의문을 제기할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 시기는 소련 지도부가 군비통제 협상과 비밀 프로그램 유지라는 상충하는 요구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던 국면을 보여준다. 군수공업 총괄자로서 자이코프의 역할은 감축 협상의 대외적 수행과 협약 위반 프로그램의 은폐라는 두 측면을 함께 포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