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껴안고 마오쩌둥 세대를 길러낸 베이징대학 도서관장
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 1907–1913톈진 북양법정전문학교 정치경제학 전공
- 1913–1916와세다대학 유학, 반위안스카이 학생운동 지도
- 1918–1927베이징대학 도서관장·역사학 교수, 『신청년』 편집위원
- 1919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조직자
- 1920베이징 공산주의 소조 창립, 보이틴스키와 천두슈 연결
- 1921중국공산당 공동 창립자 (제1차 전국대표대회)
- 1922–1924제1차 국공합작 주창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 1926–1927농민무장혁명론 전환, 소련대사관에서 지하활동 지도
관련 역사 사건
5·4운동의 지도자에서 당 창립자로: '남진북리'
1919년 5·4운동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둥성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에 양도하기로 결정한 데 항의하여 베이징에서 폭발했다. 리다자오는 이미 신문화운동의 중심지였던 베이징대학 도서관장이자 『신청년』 편집위원으로서 학생 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였으며, 그의 도서관 사무실은 시위를 조직하는 학생 활동가들의 기획 본부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5월 4일 시위 행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운동은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와 '근본적 해결'을 향한 급진적 정치 행동의 물결을 일으켰고, 천두슈를 비롯한 많은 신문화 지식인들이 '비정치' 입장을 버리고 혁명 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5·4운동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정착시키는 본격적인 조직화에 착수했다. 1920년 초 코민테른 대표 그리고리 보이틴스키가 베이징에 도착하자 리다자오는 그를 상하이의 천두슈에게 연결시켰고, 이로써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양대 축이 형성되었다. 천두슈가 1920년 5월 상하이에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한 데 이어, 리다자오는 같은 해 9~10월 베이징에 병행 조직을 창립했다. 이 구도는 곧 '남진북리'(南陳北李)로 불리며 초기 당의 비공식적 지도 체제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 리다자오의 가장 중요한 제자는 도서관 보조원으로 일했던 마오쩌둥이었다. 1918~1919년 겨울 리다자오는 마오에게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소개했고, 10월 혁명에 대한 자신의 혁명적 신념과 농촌으로 향하라는 포퓰리즘적 호소를 전수했다. 마오는 훗날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동지라는 위대한 인물을 만났다. 오직 그의 도움으로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진정한 나의 스승이다"(1949)라고 회고했다. 리다자오의 소규모 연구 집단은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을 창립한 핵심 세포가 되었다. 리다자오 자신은 베이징에서의 업무로 인해 대회에 불참했으나 그의 제자 장궈타오가 대표로 참석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중국적 전유: 의지론, 민족, 농민
리다자오의 마르크스주의는 정통 유럽 맑스주의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경제결정론에 회의적이었고, 베르그송과 에머슨의 영향을 받아 의식적 인간 행위가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지론적 세계관을 견지했다. 1919년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에서 유물사관의 경제결정론적 측면에 유보를 표하면서도 계급투쟁론은 강조했으며, 물질적 변혁과 함께 윤리적·정신적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여름 후스(胡適)와의 「문제와 주의」 논쟁에서 리다자오는 '개별 문제의 점진적 해결'을 주장한 후스에 맞서, '주의'가 있어야 '근본적 해결'을 위한 대중운동의 공동 방향이 설정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는 점진적 개량과 정치혁명 사이의 노선 대립으로, 중국 지식계의 분기점이 되었다.
리다자오의 또 다른 이론적 혁신은 중국 전체를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파악한 점이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착취당하는 중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하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이 구상은, 도시 노동계급이 미약한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를 민족 전체로 확장하는 논리였다. 이에 기초해 그는 중국이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고 보았으며, 1919년 「청년과 농촌」에서는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가서 농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포퓰리즘적 호소를 전개했다. 1923년 경한철도 파업 탄압 이후 그의 관심은 완전히 농민무장투쟁으로 전환되었고, 1926년 홍창회(紅槍會) 논고에서 농민비밀결사의 자생적 무장력을 혁명의 주력으로 재평가했다. 이러한 사상적 궤적은 훗날 마오쩌둥의 농촌혁명노선을 예비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1차 국공합작의 설계자: 쑨원과의 동맹과 '프롤레타리아 민족' 노선
1922년 코민테른은 초창기 중국공산당에 쑨원의 국민당(중국국민당)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라고 공식 지시했다. 천두슈를 비롯한 대다수 공산당 지도부는 부르주아 정당과의 제휴에 반대했으나, 리다자오는 이 정책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의 민족주의적·포퓰리즘적 세계관은 광범한 민족연합전선에 대한 강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고, 1922년 가을 리다자오는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 최초의 공산당원이 되었다.
1922년 8월 상하이에서 리다자오는 코민테른 대표 마링과 함께 쑨원을 만났다. 이 회담에서 쑨원은 공산당원들이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당내 블록'(bloc within) 방식을 수용했다. 1924년 1월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리다자오는 대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국민당 내 공산주의자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대의원들 앞에서 공산당원들은 '민족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참여하는 것이지 국민당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쑨원의 신임을 받은 그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리다자오의 국공합작 해석은 천두슈 및 코민테른과 뚜렷이 달랐다. 천두슈가 중국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론을 수용하고 합작을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전의 일시적·전술적 필요로 본 반면, 리다자오는 민족혁명을 하나의 영속적인 연속적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에게서 중국 전체는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서 세계 혁명의 일부였으며, 반제국주의 민족혁명과 사회주의 세계변혁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이 의지론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혁명관은 레닌주의 정통은 물론 동료 공산당원들의 결정론적 관점과도 거리가 멀었으며, 훗날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에 중요한 사상적 선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