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
독일 독일 1871–1919 ✕ 살해

전쟁공채에 홀로 반대표를 던진 의원, 혁명의 첫 순교자

“주적은 우리 안에 있다.” — 반전 팸플릿(1915)

독일 사회주의 혁명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차관에 유일하게 반대한 제국의회 의원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단·독일공산당을 창립했다. 1919년 1월 봉기 후 의용군에게 살해되었다.

경력 연표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 — 1907년 반역 재판

1907년,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사회주의청년인터내셔널 의장으로서 팸플릿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출간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군국주의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시도였다. 리프크네히트는 군국주의를 대외적 기능과 대내적 기능으로 구분했다. 대외적으로는 주변국에 대한 침략적 강경책과 전쟁 준비를, 대내적으로는 노동계급과 모든 진보적 운동에 대한 탄압 기제를 의미했다. 그는 프로이센 전쟁장관 카를 폰 아이넴 장군의 발언("정치적 신념이 의심스러운 명사수보다 왕에게 충성하는 못 쏘는 병사가 낫다")을 인용하며 군국주의의 정신을 규정했다.

이 팸플릿은 곧바로 제국 정부의 표적이 되었다. 아이넴 장군이 국가반역 혐의로 형사 절차를 요청했고, 1907년 10월 라이프치히 제국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리프크네히트는 스스로 변호에 나서 "황제의 명령이라도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명령한다면 무효"라고 주장했다. 법정은 그에게 1년 6개월의 요새금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의 법정 투쟁은 베를린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수감되는 날 군중이 그를 배웅했다.

수감 중이던 1908년,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 아래서 사회민주당 최초의 8인 중 하나였다. 반군국주의 투쟁으로 얻은 감옥살이는 그의 정치 경력을 끝내지 못했고, 오히려 전국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에서 전개된 분석(자본주의 아래서 군국주의는 구조적이며, 반군국주의 투쟁은 곧 계급투쟁이라는 명제)은 7년 후 그가 전쟁공채 표결에서 홀로 반대표를 던질 수 있었던 이론적·정치적 토대였다.

1914년 12월 2일 — 전쟁공채에 홀로 반대한 의원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정확히 1주일 후, 독일 제국의회는 1차 전쟁공채를 표결에 부쳤다. 사민당(SPD)은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노동자 국제주의의 정당이 자국 정부의 전쟁 예산에 찬성표를 던지는 순간, 제2인터내셔널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원내 총의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2월 2일, 2차 전쟁공채 표결에서 그는 홀로 일어나 반대표를 던졌다. 제국의회 397명 중 유일한 반대였다.

"이 전쟁은 양측 모두 제국주의 전쟁입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은 독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안에, 독일 지배계급 안에 있습니다."

SPD 원내대표단은 그를 제명했다. 그는 강제 징집되어 동부전선으로 보내졌고, 이후 반전 시위로 체포되어 1918년 10월까지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베를린 11월 혁명의 중심에 섰다.

그의 단독 반대표는 20세기 내내 반전 운동가들에게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다. "주적은 우리 안에 있다." 이 말은 독일의 특수한 상황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제국주의 전쟁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명제로 살아남았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 1918년 12월 30일

1918년 10월 감옥에서 풀려난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스파르타쿠스단을 독자적인 정치조직으로 재편했다. 11월 9일 그는 베를린 왕궁에서 '자유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했고, 룩셈부르크와 함께 일간지 《디 로테 파네(Die Rote Fahne)》를 창간했다. 그러나 1918년 12월 16~20일 열린 전독일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회에서 다수는 조기 총선과 평의회 해산을 선택했고,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대회 참여에서 배제되었다.

사민당(SPD) 주도의 임시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가 군대를 동원해 혁명적 좌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2월 24일 베를린 크리스마스 전투에서 인민해군사단을 공격하고, 그 결과 독립사민당(USPD) 계열 인민대표 3인이 사퇴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의회정치의 틀 안에서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1918년 12월 30일 베를린에서 전국 대의원들을 소집해 독일공산당(KPD) 창립대회를 열었다.

창립대회는 1919년 1월 1일까지 이어졌으며, 의회제를 거부하고 평의회 공화국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KPD는 독일 최초의 전국적 공산주의 정당이었고, 코민테른 창립(1919년 3월) 이전에 이미 독자적으로 결성된 몇 안 되는 공산당 중 하나였다. 당의 핵심 이론가였던 룩셈부르크는 총파업과 대중 동원을 통한 혁명을 주장했으나, 리프크네히트는 보다 전투적인 입장에 서서 무장봉기를 배제하지 않았다. 바로 이 긴장(대중투쟁과 봉기 사이의 간극)이 2주 후 스파르타쿠스 봉기에서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KPD는 이후 독일 좌파 정치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했으며, 나치 집권 후에는 지하 저항의 중심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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