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경력 연표
-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블랑키즘: 혁명적 전위의 전략
블랑키즘(Blanquism)은 소수의 규율 잡힌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비밀결사가 무장봉기로 권력을 장악한 뒤 혁명적 독재를 수립하고, 대중교육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해야 한다는 혁명 전략이다. 블랑키에게 혁명의 핵심 동력은 경제적 필연성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였다. 그는 역사적 결정론을 배격하고 "혁명은 먼저 정신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프롤레타리아가 무지 상태에 놓여 있는 한 자발적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계몽된 소수 전위가 먼저 권력을 장악하고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역설이 블랑키즘의 핵심 긴장으로 작용한다.
블랑키는 집권 후 '파리 독재(Parisian dictatorship)'라 불리는 과도정부가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하고 프롤레타리아를 무장시키며 전국적 공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구상했다. 그에게 사회 갈등은 "민족을 구성하는 계급들 사이의 죽음을 건 전쟁"이었으며, 중립이나 타협은 가장 큰 정치적 과오였다. 마르크스는 1848년 블랑키를 '프랑스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지도자'로 칭송했으나, 엥겔스는 블랑키를 '행동만 있고 사회주의 이론이 없는 정치혁명가'로 규정하며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전위당 개념이 본질적으로 블랑키즘에 가깝다고 비판했고,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이를 반박하며 "우리는 블랑키스트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볼셰비키의 직업혁명가 전위당 이론과 무장봉기 전략에 블랑키즘이 남긴 흔적은 깊다.
파리 코뮌과 '위대한 부재자'
블랑키는 1871년 3월 17일, 전년 10월 봉기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브르타뉴의 토로 성(Château de Taureau)에 수감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3월 18일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고, 그는 부재중에 코뮌 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블랑키의 추종자들, 이른바 블랑키스트들은 코뮌 내에서 가장 규율 잡힌 전투력으로 평가받았다. 약 1천 명의 대원이 10명 단위의 독립적인 세포 조직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이들 중 다수가 코뮌의 핵심 군사 지도부를 구성했다. 에밀 외드(Émile Eudes), 라울 리고(Raoul Rigault),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 등 블랑키의 제자들은 공안과 국방의 요직을 맡았다.
코뮌은 자신들의 모든 인질, 파리 대주교 조르주 다르부아(Georges Darboy)를 포함한 약 70명을 블랑키 단 한 사람과 교환하자고 베르사유 정부에 반복해서 제안했다.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정부는 블랑키가 석방될 경우 코뮌에 진정한 지도부를 제공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제안을 계속 거부했다. 대주교 다르부아는 결국 '피의 주간(Semaine sanglante)' 중에 처형되었고, 블랑키는 코뮌의 전 과정을 감옥에서 보낸 채 파리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블랑키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코뮌 진압 8년 후인 1879년의 일이었다. 그는 코뮌의 '위대한 부재자'로 불리며, 이 체포와 부재의 아이러니는 19세기 혁명사에서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