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리흐 류시코프

Генрих Люш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02–1945 다롄에서 사망, 정황 미확인

극동 NKVD 국장, 최고위 망명자

1938년 6월 13일 밤, 훈장을 단 야전 복장으로 제59국경분견대에 나타난 류시코프는 분견대장에게 비밀 요원과 단독 접선한다며 물러나게 한 뒤 국경을 넘어 일본 측에 투항했다.

오데사 출신으로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근무하며 1920년대부터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 극동의 체카·OGPU·NKVD 요직을 거쳤다. 1930년 독일 융커스 사에 대한 산업스파이 임무를 수행했고, 1936~1937년 아조프-흑해 지역과 극동의 NKVD 국장을 지내며 대숙청의 대규모 체포와 처형을 지휘했다. 1937년 극동 NKVD 국장 재임 중 고려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는 데 관여했으며, 이는 25만 명 규모 추정치의 사망자를 낳은 소련 최초의 민족 단위 강제이주였다. 1938년 6월 체포될 것을 알아차리고 만주국으로 넘어가 일본 측에 투항해 소련 군사정보를 넘겼고, 1945년 8월 소련군이 다롄에 다가오자 일본 측 인사에게 사살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일본을 위한 활동

류시코프는 소련을 탈출한 뒤 일본 측에 대숙청의 전모와 NKVD의 수법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1938년 7월 13일 일본 신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모스크바 재판의 음모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하바롭스크 감옥에서 자살한 A. 야. 라핀 전 극동공군 사령관이 중앙위원회에 보낸 유서를 증거로 공개했다.

그는 NKVD 출신 최고위 망명자로, 도쿄와 다롄에서 일본 참모본부 정보기관, 즉 '동아시아 연구국'과 관동군 참모부 제2부 고문으로 일했다. 류시코프가 넘긴 정보는 일본이 소련 극동 병력 규모를 처음으로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극동과 시베리아, 우크라이나에서의 소련군 병력 배치와 동원 계획, 방어 시설 건설, 요새와 요새지대, 군사 무선 암호, 극동의 NKVD 요원 명단, 그리고 정보기관의 기만 작전인 '마키-미라주'까지 알려주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이 폭로가 관동군의 적극적 군사 도발을 촉발했고 '아마도' 할힌골 전투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서술한다.

일본 측 평가에 따르면 류시코프의 정보는 '극히 귀중한' 것이었고, 일본군 제5부는 소련이 평시에 최대 28개 소총병 사단을 대일 배치할 수 있고 필요시 31~58개 사단을 집중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소련의 항공기 2천 대와 전차 1천9백 대에 대해 일본은 항공기 340대와 전차 170대밖에 내놓을 수 없었다. 실제 전력비는 이전에 가정한 3대 1이 아니라 5대 1 또는 그 이상이었고, 이는 기존의 대소련 군사작전 계획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정보의 수신 경로도 포착되었다. 모스크바는 그가 일본에 무엇을 넘기고 있는지 알기를 갈망했고, 베를린은 해 debriefing를 돕기 위해 정보 장교를 도쿄로 파견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독일 대사관에 있던 그 최고 기밀 보고서 사본을 입수해 1938년 모스크바로 전달했고, 1939년 1월에는 1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가 전달되었다. 골드만의 서술에 따르면 모스크바는 류시코프가 소련의 군사 배치와 암호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암호를 교체했다. 다만 이 효과에 대한 평가는 2차 문헌의 해석이므로 확정된 사실로 제시할 수 없다.

망명의 파장은 소련 내부에도 미쳤다. 그의 탈출은 NKVD 국장 예조프의 해임 이유 중 하나로 이용되었다. 전 NKVD 국가보안총국 경비부장 I. 야. 다긴의 증언에 따르면 예조프는 이 소식을 듣고 울면서 '이제 나는 끝났다'고 말했다. 한편 극동군 사령관 블류허는 류시코프의 망명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사망했고, 이전 극동 NKVD 국장 데리바스의 체포와 처형은 류시코프가 수집한 증거의 결과였다.

소련은 1939년 그를 궐석으로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1962년 모스크바 군관구의 결정(제 n-796/os호)은 그에 대한 형사 사건이 개설된 적이 없다고 확인했다. 일본에서 그는 야모고치 도시카즈라는 이름으로 시민권을 얻었으며, 이후 일본 측은 그의 가족을 찾지 못하자 그를 일본에 묶어두기 위해 동거 여성을 붙여주었다. 그는 미국행을 계획하고 자서전 출간을 미국 출판사와 논의했으며, 출국이 저지될 것을 우려해 서면 신변 보장까지 요구했다.

1945년 7월 20일 그는 만주국의 관동군 특무 정보기관에서 일하도록 보내졌다. 8월 9일 소련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자 그는 혼란 속에서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다롄 기차역의 군중 속에서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남았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가 다롄에서 명예 수감자 신분으로 장성급 봉급을 받고 있다가 1945년 8월 19일 소련군이 접근하자 일본 장교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사망 경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사망의 전모는 1979년에 이르러 밝혀졌다. 전시 그의 담당관이었던 젊은 정보장교 다케오카 유타카는 1945년 8월 19일 저녁 그를 사살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소련군이 접근하는 상황에서 다케오카의 상관 야나기타 겐조 장군은 그가 포로로 잡히면 일본의 군사 기밀을 넘길 수 있다는 점을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다케오카는 류시코프에게 자결을 권유했으나 그가 거부하자 총을 쏘았다. 류시코프는 화장되었고 유골은 무명 전사자를 위한 사찰에 안치되었다. 이는 재판에 의한 처형이 아니라 일본 측 구금 상태에서의 임의 사살이었다.

스탈린 암살 계획

류시코프는 일본에 망명한 직후 관동군 정보부에 스탈린 암살 계획을 제안했다. 아조프-흑해 지역 NKVD 국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스탈린이 마체스타 온천에서 입욕 치료를 받을 때의 경호 체계를 직접 설계한 장본인이었다. 소치의 별장 배치, 경호 인력의 교대 패턴, 접근로 차단 방식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일본 측은 이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류시코프를 지휘관으로 삼고 백계 러시아 망명자 6명으로 구성된 암살조를 편성했다. 이들은 터키-소련 국경을 넘어 바투미 인근 산악 지대를 통과해 소치로 잠입할 예정이었다. 류시코프는 작전을 위해 직접 국경 지형을 답사했고, 1939년 초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암살조에는 소련 정보기관이 심어둔 첩자가 끼어 있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 소련 경비대의 매복에 걸려 조 전원이 사살되거나 도주했고, 류시코프 본인도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터키 쪽으로 탈출했다. 이 작전은 스탈린에 대한 유일하게 진지하게 준비된 암살 시도로 평가된다. 류시코프는 이후 다롄(다이렌)으로 거처를 옮겨 관동군의 대소련 정보 업무에 전념했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