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난다피 라코토니리나

Manandafy Rakotonirina

1972년 혁명세대 좌파 정당 MFM의 창당자

MFM이 마침내 혁명전선에 들어오자 라치라카는 ‘더 이상 MFM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몽자 자오나의 모니마에서 정치에 입문한 농학대 교수 라코토니리나는 1972년 5월 시위를 조직해 치라나나 정권의 퇴진을 이끈 학생세대의 지도자였다. 1972년 12월 마오쩌둥주의 좌파 정당 소민 권력 투사(MFM)를 창당했으나 1976년 라치라카 정권에 해산·연금되었다가, 이듬해 6월 혁명전선(FNDR)에 합류해 혁명최고평의회 경제위원장으로 국유기업을 맡았다. 이후 자유주의로 돌아서 1991년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2009년 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다른 이름: 코토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87~1993년 ‘4M 전선’에서 민주화 이행 공동의장까지

1980년대 후반 라치라카 체제 안에서 라코토니리나는 합법적 야당 활동이 봉쇄된 조건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비판의 공간을 만들어 갔다. 1987년 MFM은 마하랑가 치소조니의 VSM, 마로자마 라자나바히니의 VITM, 몽자 자오나의 MONIMA와 함께 혁명방위민족전선(FNDR) 내부에 ‘4M 운동’을 결성했다. 네 지도자의 이름이 모두 M으로 시작해 붙은 이 명칭은 스스로를 ‘거부의 전선’으로 규정한 일종의 미니 전선이었고, 참여 정당들은 체제 안에 있으면서 체제를 비판했다. 이후 기독교 단체 CEADAM이 여기에 합류해 민주동맹(Alliance démocratique)이 구성되었는데, CEADAM은 정당이 아니라 교회와 연결된 기독교 조직이었다. 이 민주동맹은 1989년 대통령선거에서 라코토니리나를 후보로 세웠고, 그는 891,161표(19.31%)를 얻어 라치라카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같은 선거에 나선 라자나바히니 마로자마는 14.87%, 몽자 자오나는 3%를 득표했다. 선거 후 MONIMA와 VITM이 미니 전선에서 이탈해 FNDR로 돌아가면서 야당 진영에는 MFM, VSM, CEADAM과 AKFM에서 분화한 AKFM 파나바오자나(AKFM 르누보)만이 남았다. 1991년 4월 이들 세력은 다른 단체들과 결합해 새로운 조직인 활력세력(Forces Vives)으로 전환했고, 라코토니리나는 알베르 자피, 목사 리샤르 안드리아만자토와 함께 지도부에 섰다. 이들은 1991년 5월부터 10월까지 1975년 이래의 사회주의 체제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을 조직했다. 이 시기 MFM은 오랜 강령인 ‘프롤레타리아 권력 투쟁’을 버리고 당명을 마다가스카르 진보당(Militant Party for the Development of Madagascar)으로 바꾸며 우경화했다. 1991년 10월 파노라마 협정으로 이행 기구가 세워지자 그는 안드리아만자토와 함께 130인으로 구성된 경제사회재건위원회(CRES)의 공동의장을 맡아 1993년까지 재임했다. 같은해 11월 대통령선거에서는 10.2%를 얻어 자피와 라치라카에 이어 3위에 그쳤고, 1993년 총선에서 마난드리아나 선거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98년까지 재임했다. 1970년대 국유기업을 관장하던 혁명최고평의회 위원이 반체제 이행정부의 공동의장이 되기까지, 이 경로는 체제 내 합법 야당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출발한 축적이 체제 전복적 요구로 전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