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내내 공화국을 상징했으나 끝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한 마지막 대통령
「평화, 자비, 용서입니다.」 1938년 7월 18일, 내전 2주년에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아사냐는 74분 동안 유혈 중단과 화해를 호소했으나, 프랑코도 공화국 강경파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내전기 공화파의 상징적 구심점. 1931년 전쟁장관·총리로 군 개혁과 반교권 정책·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34년 인민전선을 조직해 1936년 대통령에 올랐으나 내전 내내 실권은 총리들에게 넘어갔다. 1938년 바르셀로나에서 「평화, 자비, 용서」를 외쳤지만 프랑코 진영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1939년 카탈루냐 함락 뒤 아내와 함께 피레네 산길을 걸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했다. 공화파 안에서조차 '도주'라는 비난을 받은 이 결정은 공화국의 잔존 정통성을 무너뜨렸고, 그는 망명 1년 만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3–1920마드리드 아테네오 서기
- 1926공화행동당 창당
- 1931.04–10전쟁장관
- 1931.10–1933.09총리 겸 전쟁장관
- 1936.02–05총리
- 1936.05–1939.02공화국 대통령
관련 역사 사건
1934년 체포와 인민전선 결성
1934년 10월 5일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국적 봉기가 아스투리아스와 바르셀로나에서 일시적으로 성공했다가 2주 만에 진압되자, 레루스-세다 정부는 마침 바르셀로나에 있던 아사냐를 봉기에 연루시켜 제거하려 했다. 10월 8일 군 당국이 그를 체포했고, 그는 「시우다드 데 카디스」호와 구축함 「알칼라 갈리아노」호·「산체스 바르카이스테기」호 등 해군 함정에 나뉘어 수감되며 바르셀로나 봉기와 무기 밀수, 포르투갈 관련 혐의를 두고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혐의를 뒷받침할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고, 12월 28일 대법원은 절차를 취소하고 그를 석방했다. 이 수감은 오히려 그에게 공화국 수호의 상징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안겼다. 구금 기간에 그를 지지하는 여론이 크게 일었고, 동시에 우파의 공격도 거세지면서 '아사냐주의자'와 반대자 사이의 대립이 뚜렷해졌는데, 이는 다가올 내전의 예비적 분열이었다.
석방 뒤 아사냐는 공화파 좌파의 결집을 자기 정치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1935년 5월 발렌시아 메스타야 구장 집회를 시작으로 그는 공화국과 헌법의 유효성을 다시 내세우는 대중 집회를 이어갔고, 특히 마드리드 인근 코미야스 구장 집회에는 약 50만 명이 모였다고 전해질 만큼 개인적 영향력이 컸다. 처음에는 사회당 라르고 카바예로가 공화파와의 연합을 거부했으나, 세다가 정권을 잡을 듯한 정국 위기가 닥치자 1935년 11월 태도를 바꿔 선거에 한정한 연합을 수용했고, 여기에 급진사회당과 공산당까지 가담하면서 좌파 연합은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36년 2월 16일 선거에서 인민전선은 득표 차는 작았으나 의석에서는 압도적으로 이겼고, 아사냐는 2월 19일 총리직에 다시 올랐다. 그는 곧바로 1934년 봉기 관련 수감자들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고 카탈루냐 자치령 정지를 해제했으며, 파시스트당 '팔랑헤' 간부들을 대거 구금했다. 그러나 살인과 보복이 잇따르는 가운데 4월 3일 의회에서 진정을 호소했고, 그 자신도 사회당·공산당과의 결속을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했다. 이 시기 아사냐의 노선은 거리의 급진화와 제도 정치의 타협 사이에서 좁아져 갔고, 그가 대통령으로 옮겨간 뒤 공화국을 지탱할 정치적 공간은 더욱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