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성과와 민간인 피해 사이에 선 연합군 지휘관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7미 육군 보병 소위
- 1942북아프리카 연합군 작전 부사령관
- 1943–1944미 제5군 사령관, 이탈리아 전선
- 1944–1945제15군집단 사령관, 이탈리아
- 1945–1947오스트리아 미군 점령군 총사령관
- 1947–1949미 제6군 사령관
- 1949–1952미 육군 야전군 사령관
- 1952–1953유엔군사령부·극동군사령부 총사령관
관련 역사 사건
가리강 도하와 1946년 의회 조사
클라크의 지휘 판단 가운데 가장 첨예한 논쟁을 낳은 전투는 라피도강이 아니라 몬테카시노 아래 가리강에서 1944년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벌어졌다. 제5군 사령관 클라크는 안치오 상륙에 앞서 36보병사단의 두 연대에 도하를 명령했다. 공격은 무너졌다. 독일군의 사격이 교량 장비를 파괴해 전차가 뒤따르지 못했고, 약 20시간의 교전 끝에 두 연대는 철수했다. 1월 20일 공격에서 36사단이 입은 사상자는 1,681명이었다. 확보한 지형도 없었고, 독일군을 안치오에서 끌어내려던 원래 목적도 달성되지 않았다.
책임을 물은 것은 병사들이었다. 1946년 1월 20일 36보병사단 참전군인회는 만장일치로 의회에 조사를 청원하면서, '마크 W. 클라크 장군 같은 무능하고 경험이 부족한 장교가 상급 지휘부에서 이 나라 젊은이들을 죽게 하는 것을 허용하는 군사 체제'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구했다. 하원에는 두 건의 결의안이 상정되었고, 그중 하나는 이 도하를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거대한 실책 가운데 하나이자 살인적인 실책'이라고 규정했다.
전쟁장관 로버트 P. 패터슨은 이 작전이 '필요한 것'이었고 클라크가 계획과 명령에서 '건전한 판단'을 했다는 보고서를 냈다. 사단 참전군인회 회장 밀러 에인즈워스 대령은 이 결론에 반대해 증언하면서, 클라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조사를 회피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하원은 클라크의 책임을 면해 주었고, 그는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클라크가 프레드 워커 소장의 작전 수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데 대해, 워커는 자신이 반대했던 계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맞섰다. 손실의 책임을 누가 지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