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한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Ханжин
러시아 백색운동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1–1961 ○ 수용소 10년, 사후 복권

콜차크군의 볼가 진격을 이끌고 프룬제에게 무너진 포병 장군

1915년 7월 7일, 후퇴하던 12보병사단의 전열에 균열이 생기자 한진은 직접 예비 대대를 이끌고 틈새로 달려가 후퇴하는 부대를 멈춰 세웠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포병 장교로, 루소-일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포병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의 우랄 군단을 창설하고 콜차크 휘하 서부군 사령관으로 1919년 3월 전략적 돌파를 이끌어 볼가 강 30km 앞까지 진격했으나, 과신장된 전선이 프룬제의 남부군집단 반격에 노출되어 부굴마·부구루슬란에서 결정적 패배를 겪었다. 실각 후 콜차크 정부의 마지막 군무장관을 지냈고, 중국 망명을 거쳐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만주 망명기: 백군 원로에서 철도 제도공까지

이르쿠츠크에서 외국 군사사절단의 열차 편으로 빠져나온 한진은 중국으로 건너가 다롄과 칭다오에 머물렀고, 1925년부터 창춘과 묵덴, 1931년부터 상하이, 1932년부터 다시 다롄에 자리 잡았다. 만주 러시아 군사 망명자 사회에서 그는 큰 권위를 지녔고 두드러진 역할을 맡았지만, 안도그스키 장군 사건을 둘러싼 망명자 사회의 분열을 피하지는 못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는 러시아 전군동맹(로프스) 극동부 부장을 지냈다.

1935년에는 직접 발기해 포트아서를 비롯한 만주 각지 러시아 군인 묘지의 보존과 정리를 맡는 후원위원회를 세우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한편 망명 생활의 생계는 군사 업무와 무관했다. 비누 공장 이사, 콩 운송 사무소 관리, 화학 공장과 군 병기창의 기술자, 남만주철도 회사 경제부 서기, 1933년 10월부터는 남만주철도 조사부 제도공으로 지도를 만들고 교정하는 일을 했다.

이 시기의 한진은 1919년 볼가를 향해 진격하던 서부군 사령관의 지위와 뚜렷이 대비된다. 패배한 백군 장성이 만주에서는 망명자 조직의 원로로서 명예를 유지하는 동시에 임금노동, 그것도 제국 권력과 밀접한 남만주철도의 하급 기술직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1945년 9월 15일 다롄에서 아들과 함께 스메르시에 체포될 때까지 그의 삶은 이렇게 갈라진 두 얼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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