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아브라모비치 트릴리세르

Меер Абрамович Трилиссер
소련 러시아 1883–1940 ✕ 처형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설계자, 이녜의 7년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설계

1922년 5월 트릴리세르는 GPU 해외부(INO)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제르진스키가 그를 중앙기관으로 불러들인 것은 서유럽과 동유럽 전역에 대외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트릴리세르는 각 소비에트 대사관·통상대표부에 레지덴투라를 설치하고, 주재관에게 독자적 포섭 권한을 부여하는 분권형 체계를 도입했다. 1925년에는 제르진스키의 지시로 해외 과학기술·경제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경제과를 신설했고, 1923년에는 '외국 정부에 소련의 내정·군사력에 관한 허위 정보를 체계적으로 주입하기 위한' 특별허위정보국을 창설했다. 이 기구는 이후 '트레스트'와 '신디카트' 작전 같은 대규모 역정보 공작의 중추가 되었다. 트릴리세르는 책상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해외로 나가 레지덴투라를 정비하고 요원들과 접촉했다. 그가 선발하고 훈련한 정보장교들인 스피겔글라스, 슬루츠키, 블륨킨, 라이스, 펠드빈 등은 이후 수십 년간 소비에트 정보활동의 중핵이 되었다. 1926년 OGPU 부의장으로 승진한 후에도 외부정보 업무를 계속 지휘했다. 1929년 말, 트릴리세르는 겐리흐 야고다가 '우익을 비호한다'고 공개 비판하면서 OGPU 지도부 내 권력투쟁에 휘말렸고, 이른바 '트릴리세르의 열병'이라 불린 이 충돌 끝에 해외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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