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나지불라

محمد نجیب‌الله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47–1996 ✕ 고문 살해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망명 없는 은신: 1992~1996년 유엔 건물 체류와 죽음의 경위

1992년 4월 권좌에서 밀려난 나지불라는 카불의 유엔 사무소로 피신한 뒤 1996년까지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인도로의 망명을 시도했으나, 이미 두스툼 세력이 장악한 카불 공항에서 저지당했다. 인도는 그를 정치적 망명자로 받아들일 경우 새 무자헤딘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주저했고, 아프가니스탄 주재 인도 대사관으로의 피신도 '아대륙적 대립'을 자극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유엔은 안전한 통로를 마련하려 했지만 두스툼이 이를 막았다.

체류 기간 나지불라는 페터 홉커크의 《대게임》을 모국어 파슈토어로 번역하며 시간을 보냈다. 1994년 인도는 외교관 M. K. 바드라쿠마르를 카불로 보내 그를 인도로 데려가는 방안을 마사우드와 협상하게 했으나, 마사우드는 이를 거부했다. 바드라쿠마르는 마사우드가 나지불라를 전략적 자산으로 여겨 떠나보내지 않으려 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그는 다른 옛 정권 인사들과 달리 이슬람국으로부터 사면을 받지 못했고,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는 라바니 정부에 그의 출국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6년 9월 탈레반이 카불에 육박했을 때 마사우드 측은 그에게 탈출 기회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그가 당시 함께 있던 장교들은 마사우드 세력이 유엔 건물에 로켓을 쏘아 사실상 그의 탈출을 봉쇄했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996년 9월 26일 저녁,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이 유엔 건물에서 그를 끌어냈다. 영어 기록은 그가 유엔 구금 상태에서 납치되어 머리에 총을 맞았고, 탈레반 대원들이 시신을 트럭에 매달아 카불 거리를 끌고 다녔다고 전한다. 이튿날 나지불라와 동생 샤푸르 아흐마드자의 시신은 아르그 대통령궁 밖 교통 신호등에 매달렸다. 러시아어 기록은 그를 체포한 세력이 심문 끝에 살해한 시각을 9월 27일 새벽으로 전한다. 시신은 이후 국제적십자위원회를 거쳐 파크티아주 가르데즈로 옮겨져 아흐마드자이 부족의 장례를 치렀다.

살해의 주체를 두고는 견해가 갈린다. 소련 언론인 플라스툰과 안드리아노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특사 피터 톰슨, 전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국, 파슈툰 민족주의자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ISI)이 탈레반 내부 인사들과 함께 배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1989년 잘랄라바드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과, 나지불라의 두란드 선 반대 입장을 동기로 지목한다. 반면 다른 기록은 탈레반 세력의 직접 행동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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