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창시자
1933년 5월 13일, 동료 작가들을 자택으로 불러 모은 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 이렇게 썼다: '얄로비의 체포는 한 세대 전체의 처형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 만세, 공산당 만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기초를 놓은 작가. 바플리테를 이끌며 '모스크바로부터 멀리!'를 외치며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했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흐빌로비즘' 탄압을 받았다. 대표작 「나」, 『멧도요』.
경력 연표
- 1917–1919볼셰비키 지하운동 참여, 적군 합류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1하르키우로 이주, 문학 활동 시작
- 1922–1923『푸른 에튀드』, 「나(로맨티시즘)」 발표
- 1925–1928바플리테(VAPLITE) 주도, 『체르보니 실랴흐』 편집
- 1926팸플릿 선언으로 '흐빌로비즘' 공세 촉발
- 1927『멧도요』(발트슈네피) 출간
- 1930프롤리트프론트 조직, 곧 해체
관련 역사 사건
문학 논쟁과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흐빌로비는 1925년 팸플릿 연작 『카모 그랴데시』(Quo vadis?)와 『흐름을 거슬러』(Dumky proty techii)를 발표하며 우크라이나 문학 논쟁의 불씨를 당겼다. 그의 핵심 주장은 세 가지였다. 첫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문학은 러시아 문학의 아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러시아 문학은 19세기 고전도, 당대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불필요한 인간들'과 관료적 슬로건으로 가득하여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의 모델이 될 수 없다. 둘째, '심리적 유럽'을 지향하라. 괴테, 마르크스, 다윈의 유럽, 즉 파우스트적 능동성을 지닌 서구 문명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모스크바는 전연방적 속물주의의 중심지이며, 우크라이나 문화는 식민지적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 길을 걸어야 한다. 1926년 4월 스탈린이 카가노비치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흐빌로비의 구호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들이 모스크바를 동경하는 이때,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 흐빌로비는 지도자들에게 모스크바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떠나라고 외친다'는 스탈린의 반응은 '흐빌로비즘'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1926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흐빌로비는 공개 자아비판을 강요받았고, 그가 이끌던 문학 조직 바플리테(VAPLITE)는 1928년 강제 해산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우크라이나는 식민지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끝내 거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