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專制)를 신이 맡긴 의무로 믿은 마지막 차르
1917년 3월 2일 밤, 퇴위 조서에 서명한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주위는 온통 배신과 비겁함과 속임수뿐이다!"
1905년 군중에게 발포한 뒤에도, 1915년 총사령관을 자임해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쓴 뒤에도, 그는 물려받은 전제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는 신탁으로 믿었다. 1917년 2월 쏠 군대가 사라지자 300년 왕조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 1894차르 즉위
- 1904–05러일전쟁 패배, 1905년 혁명
- 1906기본법 공포, 제한된 두마 체제 출범
- 1915총사령관을 자임하고 전선으로, 패전 책임이 왕좌로 직결
- 1917.3퇴위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관련 역사 사건
라스푸틴과 황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의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1905년 11월 니콜라이 2세와 처음 만났다. 황제는 일기에 '토볼스크 현에서 온 신의 사람 그리고리'를 만났다고 적었다. 라스푸틴이 황실의 신임을 얻은 결정적 이유는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에게 의학이 속수무책일 때 고통을 덜어준 데 있었다. 니콜라이 2세가 1915년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으로 떠난 뒤,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수도에서 국정을 대리하면서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내각 인사까지 좌우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각료가 수개월 단위로 교체되는 '각료 도약'은 군주제의 권위를 갉아먹었고, 라스푸틴의 방탕한 사생활에 관한 소문은 혁명 세력의 선전 재료가 되었다. 1916년 12월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과 블라디미르 푸리슈케비치 등 군주제 옹호자들이 라스푸틴을 암살했지만, 이미 왕조의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