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풀란차스

Νίκος Πουλαντζάς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과 「세력 관계의 응축」으로서의 국가를 이론화한 그리스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1969년 《뉴레프트리뷰》에 랠프 밀리밴드의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 서평을 실어,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로 기능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운영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객관적 구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밀리밴드–풀란차스 논쟁을 열었다.

아테네에서 태어난 그리스·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자·사회학자. 학생 시절 통합민주좌파(EDA)에서 활동했고, 1960년 파리로 건너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알튀세르의 구조주의로 옮겨 갔다. 1961년 무렵 그리스 공산당에 입당했고, 1968년 당이 갈라지자 유로코뮤니즘 쪽 「국내파」에 섰다. 『정치권력과 사회계급』(1968)에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이론을 세우고 밀리밴드와 논쟁했으며, 파리 8대학 뱅센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마지막 책 『국가, 권력, 사회주의』(1978)에서 국가를 계급 세력 관계의 물질적 응축으로 정의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을 제시했다. 1979년 파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아테네 법학도에서 파리의 마르크스주의자로

1936년 9월 21일 아테네의 이름난 집안에서 법의학 필적 감정학 교수 아리스티디스 풀란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3년 아테네 대학 법학부에 들어간 것은 법조인이 되려 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만 철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시절 비합법 그리스 공산당(KKE)과 느슨하게 이어진 학생 조직에 속했고, KKE의 합법 전선이던 통합민주좌파(EDA)에 참여해 키프로스 문제로 시위하다 1955년 잠시 체포되었다.

1960년 서독 뮌헨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한 달 만에 나치 사상의 영향이 너무 강하다며 파리로 옮겼다. 판테옹소르본 대학에서 법철학 강의를 맡았고, 1964년 박사 논문 『사물의 본성과 법』을 냈다. 이 시기 그는 사르트르·골드만·루카치에 기대어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종합해 사실과 가치의 이원론을 넘어서려 했으나, 뒤에 이 작업을 「역사주의와 인간주의」라며 스스로 버렸다. 1964년부터 《현대》에 꾸준히 글을 썼다.

1961년 무렵 파리에서 KKE에 입당했고, 차츰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와 그람시·콜레티 같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쪽으로 옮겨 갔다. 1967년 그리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파리의 그리스인 반독재 위원회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KKE가 갈라지자 반스탈린주의·유로코뮤니즘 분파인 「국내파」(KKE 에소테리쿠)에 섰고, 죽을 때까지 그 안에서, 흔히 당의 왼쪽에서 정치적 견해를 다듬었다.

『정치권력과 사회계급』과 밀리밴드 논쟁

1968년 5월 직전에 나온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은 국가를 지배계급이 쥐고 휘두르는 도구로 보는 도구주의도, 일반의지를 대표하는 중립적 주체로 보는 이론도 거부했다. 풀란차스의 중심 개념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 개개인이나 개별 분파의 이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어야만 자본가계급 전체의 장기적·정치적 이해를 조직할 수 있고, 이 자율성은 자본주의에서 정치와 경제가 제도적으로 분리된 데서 구조적으로 주어진다. 국가는 계급으로 갈라진 사회의 「응집 요인」으로서 피지배계급을 계급이 아닌 낱낱의 「시민」으로 흩어 놓고(「고립 효과」), 서로 경쟁하는 지배계급 분파들을 하나의 헤게모니 분파가 이끄는 「권력 블록」으로 묶는다.

1969년 11~12월호 《뉴레프트리뷰》에 실은 「자본주의 국가의 문제」는 랠프 밀리밴드의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다원주의 국가론에 맞선 중요한 책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국가 엘리트」의 출신과 인적 관계에 매달린 「주체의 문제 설정」에 갇혔다고 비판했다. 풀란차스에 따르면 부르주아지와 국가의 관계는 객관적 관계여서, 지배계급 성원이 국가 기구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 밀리밴드는 경험적 분석의 중요성을 내세워 풀란차스를 「구조적 초결정론」이라고 되받았고, 1976년까지 이어진 이 논쟁은 십여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논의를 틀 지었다.

같은 틀로 『파시즘과 독재』(1970)는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시기 헤게모니 위기에서 나온 예외 국가로 분석하되, 그것이 독점자본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프티부르주아지에 대중적 기반을 두었음을 강조했다.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계급』(1974)은 계급이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이데올로기 수준까지 포함한 구조의 총체로 정해진다고 보고, 임금을 받더라도 감독과 정신노동의 역할을 맡는 기술자·관리자·공무원을 노동계급과 구별되는 「신프티부르주아지」로 규정했다.

『국가, 권력, 사회주의』와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

1974년 그리스·포르투갈, 1975년 이후 에스파냐의 군사독재가 무너지자 풀란차스는 『독재의 위기』(1975)에서 이 이행을 분석하며 국가를 투쟁의 장으로 보는 관계론적 국가론을 다듬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이 무너진 뒤 그리스로 돌아와 언론에 글을 쓰고 판테이온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파리에서는 미셸 푸코와 「신철학자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좌파 연합의 단결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또 선진 자본주의의 현대 국가 형태를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라 불렀다. 사회경제 생활 모든 영역에 대한 국가 통제의 강화가 정치적 민주주의 제도의 급격한 쇠퇴와 결합한 것으로, 예외 국가가 아니라 독점자본주의의 항구적 위기에 대응해 나타난 새로운 정상 형태라는 것이다.

마지막 책 『국가, 권력, 사회주의』(1978)에서 그는 알튀세르식의 경제·정치·이데올로기 「영역」 구분을 버리고, 자본이 사회적 관계이듯 국가도 사회적 관계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제 권력을 지닌 사물이나 주체가 아니라 「계급 간 세력 관계의 물질적 응축」이며, 지난 투쟁이 결정화되고 새 투쟁이 벌어지는 모순적 「전략적 지형」이다. 그는 푸코의 관계적 권력 개념과 「규율」 분석을 받아들이면서도, 계급과 국가의 억압 기능을 소홀히 한다고 푸코를 비판했다.

이 국가론에서 사회주의 전략이 나온다. 풀란차스는 「이중 권력」 상황에서 국가를 밖에서 부수는 레닌주의 모델도, 기존 제도를 차지하기만 하는 사회민주주의 전략도 거부했다. 대신 국가 내부의 모순을 파고드는 투쟁과 국가 밖 평의회·자주 관리 기구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확장을 결합해, 「긴 일련의 단절」을 거쳐 국가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을 내세웠다. 1979년 10월 3일 마흔셋의 나이로 파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밥 제솝은 그를 전후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 국가·정치 이론가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