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권력 시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혁명적 수호주의의 얼굴
「인민과의 직접적 소통을 잃자 그는 저항력을 상실했다. 거대한 떡갈나무도 폭풍에 뽑혀 자양분을 공급하던 흙에서 분리되면 시든다. 치헤이제도 그렇게 갔다」 — 이라클리 체레텔리, 1926년 장례식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 멘셰비키. 『공산당 선언』을 그루지야어로 처음 옮겼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이중권력을 주재했으나 10월혁명에 반대했고, 그루지야 독립을 이끌며 파리 망명정부 수반을 지냈다.
경력 연표
- 1890년대메사메다시 가입, 『공산당 선언』 그루지야어 초역
- 1898–1907바투미 시의회 의원·시 병원 감독관, RSDLP 입당(1898), 멘셰비키(1903~)
- 1907–173·4대 두마 의원(티플리스 현), 멘셰비키 원내대표
- 1917.2–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VTsIK 의장(6월~)
- 1918–21자캅카스 세임 의장, 그루지야 제헌의회 의장, 독립선언 서명
- 1919파리 강화회의 그루지야 대표
- 1921–26프랑스 망명, 그루지야 망명정부 수반
관련 역사 사건
1917년 이중권력과 혁명적 수호주의
1917년 2월 27일(율리우스력) 치헤이제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에 들어가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두마 임시위원회에도 합류했다. 그는 임시정부 노동장관직을 거절했지만, '혁명적 수호주의'(혁명을 지키기 위해 대독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를 견지하며 임시정부를 조건부로 지지했다. 이는 전쟁 즉시 중단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주장한 레닌의 극렬한 비판을 불렀다. 7월 봉기 후에는 볼셰비키를 '음모자'로 비난하며 소비에트의 임시정부 전폭적 지지를 선언했고,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에는 반혁명투쟁인민위원회 위원으로 크론시타트 수병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9월 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볼셰비키의 '권력에 관하여' 결의안을 채택하자, 치헤이제는 멘셰비키·사회혁명당 간부단 전원과 함께 사임했고, 의장직은 트로츠키에게 넘어갔다. 이 사임은 볼셰비키의 10월 봉기를 향한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