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프로코피예비치 페도렌코

Николай Прокофьевич Федор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2006 ○ 자연사

수학으로 계획경제를 재설계한 CEMI의 창립자이자 SOFE의 설계자

1960년대 말, CEMI는 소련 경제의 성장 둔화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스플란 의장은 폴리트뷰로 송부를 거부했고, '이데올로기적 이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연구소는 네스쿠치니 정원에서 보고서를 모닥불에 태웠다.

소련 계획경제에 수학적 최적화 방법론을 제도화한 경제학자. 1963년 넴치노프의 추천으로 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22년간 이끌며,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1971–1986)로서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과학의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프로그램-목표·부문별·지역 계획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추진했다. 2차대전에 화학부대 장교로 참전해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고, 1970년 화학공업 경제학 연구로 국가상을 수상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SOFE 옹호와 1970년대 관료적 압박

페도렌코가 1968년 저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 개발에 대하여》에서 제시한 사회주의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는 경제의 새로운 경영 메커니즘으로의 이행 경로를 모색하는 구상이었다. 그 중심에는 사회경제적 최적이라는 범주가 놓였고, 장기 계획, 경제적 결정의 분권화, 조세 규제, 최적 가격 형성 문제가 함께 다루어졌다. 그는 총자원의 제약과 주민의 수요 충족을 계획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에서도 사회적 수요가 생산 능력을 상시 앞선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고, 최적의 계획이란 주민의 수요를 보다 충분히 충족시키는 제품 구성의 계획이었다.

이 구상은 중앙 계획기구의 실질적 개편을 요구한 대목에서 관료적 반발을 불러왔다. 1974년 《계획경제》지는 익명의 필자 명의로 미국 학계의 소련 경제 연구를 다룬 글을 실어 페도렌코의 이름을 반소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고 몰아갔고, 그의 견해가 "정당한 과학적 비판"을 받아 왔다고 주장했다. 페도렌코는 그해 11월 1일자 당 중앙위원회 앞 서한에서 이런 방식이 과학적 문제 토론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항의하고, 해당 편집진의 태도를 경제수학 방향에 대한 집단적 공격으로 규정했다.

압박은 조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1974년 10월 1일 고스플란 확대 이사회는 일부 학자들이 "부르주아 과학의 무기고"에서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차용한다고 비판했고, 이듬해 2월 당 중앙위원회 부서장급 인사들은 《계획경제》 편집진이 소련 학자들의 비판과 반소적 해석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페도렌코에게는 매체를 통해 "부르주아 선전의 술책을 폭로"하는 글을 쓰도록 권고했다. 1975년 5월 모스크바 시당 위원회는 CEMI의 간부 선발과 배치에 결함이 있다고 결론짓고, 연구소 지도부가 미검증 방법론을 제안했으며 지도부가 부르주아 경제 개념 비판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이후의 조치는 연구소 자체를 겨눈 것이었다. 1983년 K.U. 체르넨코는 CEMI 활동에 다른 과학기관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결함이 드러났다고 비판했고, 그 결과 연구소는 둘로 분할되었으며 다수 연구자가 직장을 옮겼다. 페도렌코는 이 일을 "학살"로 불렀다. SOFE의 실현은 부분에 그쳤고 개혁기 학자들도 계획한 것 전부가 실현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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