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표도로비치 기칼로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Гикало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8 ✕ 처형

그로즈니 방어전을 지휘한 내전 영웅,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로 공업화·집단화를 추진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그로즈니 100일 방어전 (1918)

그로즈니 100일 방어전(Стодневные бои)은 1918년 8월 11일부터 11월 12일까지 지속된 남북전쟁의 주요 전투로, 기칼로의 정치적·군사적 명성을 확립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1918년 여름, 백위대 성향의 테레크 카자크 부대는 게오르기 비체라호프의 지휘 아래 약 1만 2천 명 규모로 테레크 지역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지인 그로즈니를 공격했다. 당시 21세의 기칼로는 그로즈니 시당위원장 겸 집행위원장으로서, 수비대 병력과 주변 산악민, 빈농 카자크로 구성된 약 3천 명의 방어 부대를 소집해 직접 지휘를 맡았다.

방어 측은 중대한 열세 속에서도 3개월 넘게 도시를 사수했다. 그로즈니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직접 장갑열차를 제작하고 수류탄과 포탄 탄체를 생산했으며, 주민과 전투 부대를 위한 휘발유와 등유를 정제했다. 아슬란베크 셰리포프가 지휘하는 체첸 적군은 탄약·식량 보급과 후방 경계를 담당하며 결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9월 말,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와 미하일 레반돕스키가 현장에 도착해 알렉산드르 디야코프 휘하의 순자 전선 소비에트 부대(약 7천 명)를 조직, 10월부터 포위군의 후방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11월 12일, 성내 수비대와 디야코프 부대의 동시 공격으로 카자크의 저항은 무너졌고 100일간의 포위가 풀렸다.

전투 후 그로즈니에서는 승리 기념 집회와 합동 열병식이 열렸고, 오르조니키제는 레닌에게 승전을 타전했다. 기칼로는 이 방어전의 공로로 혁명군사평의회 명령에 따라 적기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테레크의 총사령관'으로 불리며 북카프카스에서 전설적 지위를 얻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회고록에서 "체첸 빨치산들이 그에게 품은 엄청난 신뢰에 관해 전설이 떠돌았다"고 기록했다. 그로즈니 시는 이 전투를 기려 후일 적기훈장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명예혁명적기훈장을 받았고, 도시 중심가에는 기칼로·셰리포프·가푸르 아흐리예프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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