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를 구하고, 흐루쇼프를 무너뜨린 크렘린의 두 얼굴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경력 연표
- 1917–1921적위대 및 붉은군대 복무
- 1921–1932체카-OGPU에서 돈 지역 및 중앙아시아 근무, 바스마치 진압 참여
- 1937–1940쿠이비셰프 주당위 제1서기, 포스티셰프 공격으로 부상
- 1943–1948오룔 주당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운동 지휘
- 1949–1952크라스노다르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1953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후보위원, 소련 조달장관
- 1955–1957보로네시·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 '고리키식 주택건설' 추진
- 1957–1960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
- 1959, 1962–1966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조달위원회 의장
- 1964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
관련 역사 사건
1964년 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핵심 조직자
이그나토프는 1964년 흐루쇼프 축출 음모에서 가장 적극적인 조직자였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반당그룹을 분쇄하며 흐루쇼프의 권력을 구했던 그였지만, 1960년 간부국(프레지디움)에서 밀려나고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좌천된 후 흐루쇼프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1962년 12월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 복귀한 이그나토프는 이 직위를 이용해 소련 전역을 돌며 지방 당 서기들과 개별 접촉을 시작했다. 그의 임무는 흐루쇼프의 개혁(특히 당 조직을 산업·농업 계통으로 분할한 소브나르호스 개편)에 불만을 품은 지역 간부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음모의 핵심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알렉산드르 셸레핀, 그리고 KGB 의장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가 있었지만, 현장 조직력에서는 이그나토프가 단연 두드러졌다. 그는 1964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러시아공화국 의장이라는 공식 신분을 활용해 각 지역을 순회하며, 흐루쇼프가 없는 사이 중앙위원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할 수 있는 실무적 기반을 닦았다.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그나토프만큼 열성적으로 뛰어다닌 사람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피춘다에서 휴가 중일 때 이그나토프는 모스크바에 남아 중앙위원 과반수의 참석을 보장하는 막후 조율을 맡았다. 10월 13일 소집된 간부국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당했고, 다음날 중앙위 전원회의는 이를 만장일치로 추인했다. 그러나 이그나토프는 이 음모로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브레즈네프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그나토프는 러시아공화국 의장직에 그대로 머물렀다. 1966년 칠레 방문 중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감염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한 번도 최고 권력의 가장 안쪽 원에 복귀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