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말기 서기국에서 외교로 밀려난 간부 책임자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 페고프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함대는 이미 인도양에 있으며, 소련은 제7함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 집권 말년에 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흐루쇼프 집권 후 외교 일선으로 옮겨간 소련의 당·국가 간부이다. 1952년 10월 스탈린 부재 시 말렌코프·수슬로프와 함께 서기국 회의를 번갈아 주재하는 핵심 3인에 들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 상임위와 서기직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이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로 국가기구 실무를 총괄하다 1956년 이란 대사를 시작으로 알제리·인도 대사를 거쳐 외무차관으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 외무부에 미 제7함대 개입을 막겠다고 공개 약속해 소련 해군의 억지력을 과시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8–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38극동지역당위원회 제3서기, 이후 프리모르스키 조직국 제1서기
- 1939–1947프리모르스키 주당위원회 제1서기 (194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시당위 제1서기 겸임)
- 1941–1945극동전선·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
- 1947–1952중앙위 당기관검증국 부국장 → 경공업부장 → 당·노조·콤소몰 기관 담당 부장 → 간부선발배치부장
- 1952–1953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후보위원
- 1953–195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56–1973주이란 대사 (1956–63) → 주알제리 대사 (1964–67) → 주인도 대사 (1967–73)
- 1973–1982외무차관 → 중앙위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52.10–1953.03
1953.03 해임
관련 역사 사건
극동 지도부와 나홋카 항 건설, 1938~1947
페고프는 1938년 6월 당 중앙위 지도간부부의 책임조직원을 거쳐 같은 해 9월 극동주위원회 제3서기로 임명되면서 하바롭스크로 갔다. 곧 중앙위가 면적이 넓어 통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극동주를 분할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현지 간부와 군부의 의견을 모아 분할안을 중앙에 올렸고 그 제안이 채택되었다. 1938년 10월 20일자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명령으로 하바롭스크주와 프리모리예주가 신설되었고, 그는 프리모리예주 당 조직국 제1서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부임했으며 1939년 2월 16일부터는 프리모리예주위원회 제1서기, 1940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토크시위원회 제1서기를 겸했다.
그의 재임기 주요 사업은 새 항만 건설이었다. 당시 프리모리예에는 이미 과부하 상태인 블라디보스토크 외에 정비된 항구가 없었고, 달스트로이용 대량의 폭약까지 철도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중되고 있었다. 1939년 4월 정치국원 안드레이 지다노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을 때 페고프와 함대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지다노프와 함께 구축함을 타고 나홋카 만을 시찰했고, 곧 그곳에서 항만 공사가 시작되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된 뒤 프리모리예는 전시 생산기지이면서 대일전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같은 해 10월 스탈린은 페고프와 태평양함대 사령관 이반 유마셰프, 극동전선 사령관 이오시프 아파나센코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대일 개전 시의 대응을 지시했고, 페고프는 유격전 준비까지 맡았다. 이 무렵 프리모리예的地下구역당위원회 구성이 승인되고 타이가에 유격기지가 조성되었으며, 전시 모금으로 장갑열차와 전차종대, 폭격기 편대가 마련되었다. 소련-일본 전쟁기인 1945년 8월 5일 극동전선이 제1극동전선으로 개편되면서 그는 그 군사평의회 위원이자 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이 되었다.
1947년 3월 중앙위 당기관검사국 부국장을 맡으면서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1948년 7월 10일 경공업부장, 1952년 2월 16일 당·노동조합·콤소몰 기관부장 겸 간부선발배치부장을 거쳐 같은 해 10월 당 서기와 상무위 후보위원이 되었다. 1941년 3월 30일에는 1938년 탄압된 블류허르의 지역구를 승계해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으로 보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