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철도의 마지막 대장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49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 졸업, 유즈나야 철도 오스노바 역에서 기술자로 시작
- 1953–1960유즈나야 철도에서 부역장·운수과장·운행부장 등 역임
- 1962유즈나야 철도 제1부국장
- 1972–1976유즈나야 철도 국장
- 1976–1977소련 교통부 차관
- 1977–1982소련 교통부 제1차관 겸 열차운행총국장
- 1982–1991소련 교통부 장관, 1988년 사상 최대 화물 적재량 달성
- 1991–2007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 회장, 50편 이상의 과학 논문 발표
관련 역사 사건
쿠반의 전시 소년 시절에서 남부 철도로, 그리고 장관직 이후의 길
니콜라이 코나레프는 1927년 1월 19일 스탈리노(지금의 도네츠크)에서 태어나 쿠반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페트롭스카야, 이바놉스카야를 거쳐 네빈노미스크로 이주한 그는 이곳에서 독일 점령을 겪으며 퇴각하는 적군에 맞선 파괴 공작에 참여했다. 도시가 해방된 뒤에는 중등학교를 마치고 콤소몰에 가입해 지원병으로 전선에 나가려 했으나 시력 때문에 탈락했다.
1949년 6월 하리코프 철도운송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남부 철도에 배치되어 하리코프 철도망의 요지인 오스노바 역에서 안전기술 담당 기술자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 로조바야 역 부역장, 스물다섯 살에 철도 지부 부지부장 겸 운용과장, 1953년 12월 철도국장 보좌를 지냈고, 남부 철도 상업부 운송조건과장과 오스노뱐스키(하리코프) 지부 운용과장을 역임했다. 1959년 오스노뱐스키 지부 제1부지부장이 되면서 명예 철도인 표장을 받았고, 1960년 남부 철도 운전사업부장을 맡아 철도 노선의 운송 과정에 복합 기술을 도입한 뒤 1962년 제1부철도국장이 되었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는 남부 철도국장으로 재임했다.
1976년 1월 철도부 차관, 1977년 1월에는 열차운행총국을 함께 지휘하는 제1차관으로 올라섰다. 1982년 11월 유리 안드로포프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철도 사정을 비판한 뒤 이반 파블롭스키가 해임되면서 그는 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시절 소련 철도는 기록적인 물동량을 이루었지만 대형 참사도 잇따랐다. 1986년 코리스톱카 역, 1987년 카멘스카야 역, 1988년 아르자마스와 아우로라 열차, 1989년 우파 인근, 1990년 옐니코보 역 사고가 대표적이다.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전역에서 40건이 넘는 대형 철도 참사가 일어나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1년 2월 그는 소련 대통령에게 사표를 내면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1990년대 초 운송 회사 인테르트란스를 세워 공동 소유주이자 회장을 맡았고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철도 이음매 이론과 철도 운송의 복합 기술을 정립한 50편이 넘는 과학 저술을 남겼으며, 2007년 4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