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국왕이자 민족통일전선 지도자
1982년 6월 크메르루주·손산의 KPNLF와 함께 반베트남 연합정부를 세우고 그 수반이 되어 유엔의 캄보디아 대표권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국왕·국가원수·총리를 지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지 아래 즉위해 1953년 독립을 이끌었고 1955년 양위한 뒤 정치에 들어갔다. 1970년 축출됐다가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아래 가택 연금됐고, 1982~1991년 크메르루주와 연합한 저항 정부를 이끌었으며 1993년 왕으로 복위해 2004년 다시 양위했다.
다른 이름: 노로돔 시하눅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41–1955캄보디아 국왕
- 1955–1960인민사회동맹(상쿰)을 이끌며 총리·국가원수를 지냈다
- 1960–1970국가원수
- 1981저항 정당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창당
- 1982–1987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CGDK) 대통령
- 1991–1993최고국민평의회 의장
- 1993–2004캄보디아 국왕
관련 역사 사건
망명 저항 연합과 국제적 승인, 1979~1991
1979년 1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장악하며 크메르 루주 정권이 무너지자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시아누크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그는 크메르 루주와 결별하면서도 베트남의 침공을 규탄했고,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거처를 두고 반베트남 세력들의 저항 연합을 이끌었다. 1981년 3월에는 왕당파 저항조직인 펑시펙(FUNCINPEC)을 세웠고, 소규모 무장부대인 시아누크 민족군(ANS)을 두었다.
연합의 구성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낳은 산물이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크메르 루주가 축출된 뒤 덩샤오핑은 시아누크에게 크메르 루주와 협력해 베트남 지원 정권을 전복하자고 제안했으나,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대량학살 정책에 반대해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ANS의 군사 원조가 중국에 달려 있었고, 덩샤오핑과 리콴유의 중재로 1982년 6월 펑시펙, 손산의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 크메르 루주가 민주 캄푸챠 연합정부(CGDK)를 구성했다.
1982년 6월 2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서명식이 열렸고, 시아누크가 대통령, 손산이 총리, 키우 삼판이 외무장관을 맡았다. CGDK는 1990년 캄보디아 국가정부(NGC)로 개칭되어 1993년 해체될 때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엔이 인정한 캄보디아 대표였다. 이는 베트남 지원 인민공화국을 대신해 동구권이 제기한 대표권 교체안을 서방 국가들이 막아낸 결과였고, 1979년 11월 14일 유엔총회 표결(반대 91, 찬성 29, 기권 26)이 그 정점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CGDK를 승인했으며, 1986년 4월 10일 평양 회담에서 김일성은 시아누크를 캄보디아의 정당한 국가원수로 계속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연합 내부의 역관계는 불균등했다. 1984~1985년 베트남군의 공세로 비공산 두 세력은 군사적 주역으로서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민주 캄푸챠 국민군을 거느린 크메르 루주만이 CGDK의 실질 군사력으로 남았다. 1987년 시아누크는 대통령직에서 일시 물러났는데, 하노이와 모스크바는 그가 연합을 떠나기를 기대했다. 같은 시기 펑시펙과 KPNLF는 레이건 독트린의 일환으로 미국의 군사·재정 지원을 일부 받았다.
이 시기의 유엔 대표권 공방은 냉전 진영 대립의 산물이었고,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모순적 위치에 놓였다. 1991년 파리 평화협정을 앞두고 CGDK와 베트남 지원 정권 사이의 협상이 진행되어, 같은 해 11월 14일 시아누크는 13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캄보디아 최고민족평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