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함으로 포위된 사단을 구한 해병 지휘관
“후퇴라니,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그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중이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7미 해병대 소위 임관
- 1934–1936프랑스 육군 고등전쟁학교 수학
- 1944제5해병연대장, 뉴브리튼 작전 지휘
- 1944–1945제1해병사단 부사단장, 펠렐리우·오키나와 작전
- 1950–1951제1해병사단장, 인천·서울·장진호 작전
- 1953–1955대서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
- 1955대장으로 퇴역
관련 역사 사건
1950년 12월 장진호 활주로와 후송 결정
기존 서술은 스미스가 인천 상륙과 장진호 돌파를 지휘했다는 점을 다루지만, 포위된 사단의 후송 문제를 그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별도로 검토할 사안이다. 1950년 11월 27일 제5·7해병연대는 유담리에 있었고,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소속 사단들이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주보급로를 끊었다. 스미스는 11월 28일 사단 전방기지인 하갈우리로 이동해 그곳을 방어의 결정적 지점으로 삼았고, 이후 전투 전개는 그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그가 하갈우리에서 내린 판단 가운데 하나는 활주로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12월 1일 새벽 스미스는 사단 군의관 유진 R. 헤링 대위와 만났다. 스미스의 전시 일지에 따르면 하갈우리에는 후송을 기다리는 부상자가 약 600명이었고, 헤링은 제31연대전투단이 괴멸한 저수지 동쪽에서 400명이 더 올 것으로 보았다. 스미스는 “부상자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C-47 활주로의 완성”이라고 적었으나, 공병대는 활주로가 40퍼센트만 완성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시범 착륙을 시도하기로 결정되었고, 12월 1일 오후 첫 C-47이 하갈우리에 착륙했다. 이 활주로는 12월 1일 오후부터 12월 6일 저녁 해병대가 기지를 버릴 때까지 운영되었으며, 이 기간에 4,312명의 부상자와 동상 환자가 공수되었다.
이 결정은 사단이 당면한 선택의 성격을 보여준다. 제5·7연대는 부상자와 사망자를 모두 데리고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철수하고 있었고, 한파로 인한 동상·동창·참호족 환자가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활주로가 확보되지 않았다면 이 인원은 철수 행군을 계속 따라와야 했을 것이다. 스미스가 전투 이전부터 활주로와 보급 거점을 준비한 것은 앨먼드와 맥아더의 속도 중심 요구에 맞선 선택이었고, 후송 능력을 확보한 뒤에야 사단은 하갈우리에서 흥남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