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특수작전의 지휘관이자 선전의 산물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
다른 이름: 오토 요한 안톤 스코르체니 · 오토 스코르제니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2오스트리아 나치당 가입
- 1938오스트리아 병합 과정에서 SS 대원으로 활동
- 1943RSHA 제6국 특수공작 부문 지휘
- 1943그란사소 작전에서 SS 분견대 지휘
- 1944헝가리 판처파우스트 작전 관여
- 1944아르덴 공세 그라이프 작전 지휘
- 1947다하우 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
- 1953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
관련 역사 사건
특수부대 지휘와 반파르티잔 작전
1943년 4월, 스코르체니는 국가보안본청(RSHA) 외국정보부(Amt VI)의 발터 셸렌베르크로부터 사보타주·첩보·준군사 훈련을 위한 학교의 지휘를 맡았다. 같은 해 창설된 무장SS 특수부대 '프리덴탈'(Sonderverband z.b.V. Friedenthal)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이 부대는 이후 SS엽병대대 502, 1944년 11월에는 SS전투부대 '미테'로 개편되어 최종적으로 5개 대대로 확장되었다.
이 부대의 임무는 노동계급과 피압박 민족의 저항운동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1943년 중반 첫 작전인 '프랑수아 작전'에서 스코르체니는 요원들을 낙하산으로 이란에 파견해 산악 부족과 접촉, 트랜스이란 철도를 통한 소련 원조 물자 수송을 사보타주하도록 부추기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44년 5월에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사로잡으려던 '기사도약 작전'(Rösselsprung)의 계획에 관여했으며 지휘를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코르체니는 자그레브를 시찰한 뒤 독일 요원들의 부주의로 작전이 이미 누설되었다며 실행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작전은 강행되었고, 낙하산 부대원들은 티토의 근거지 드르바르에서 공격을 개시했지만 티토는 이미 탈출한 뒤였으며 파르티잔 제1여단의 반격으로 큰 손실을 입고 실패했다.
1945년 초 스코르체니는 오데르 강 슈베트 교두보 방어를 맡아 약 5,000명을 지휘했고, 봄에는 '미테', '노르트베스트' 등 전투단을 이끌며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 방어전에 참여해 기사십자장에 참나무잎을 받았다. 종전 무렵에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와 함께 라트슈타트-잘츠부르크 일대의 '알프스 요새'에 은신하며 국가보안본청 군사국장 자리를 받았고, 이 시기 체코슬로바키아 플로슈티나 마을을 비롯한 반파르티잔 진압 작전에 관한 책임 문제가 국제연합 전쟁범죄위원회 조사 대상으로 제기되었으나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