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박헌영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55 ✕ 처형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경력 연표

1945년 조선공산당 재건과 해방정국의 지도자

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을 들은 박헌영은 광주 벽돌공장에서 은신 3년 만에 즉시 상경했다. 8월 20일 '8월 테제'를 발표하여 봉건적 잔재 청산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친 후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제시했고, 9월 3일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해방 직후 남한에서 가장 조직된 좌익 세력으로, 1946년 남조선로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박헌영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수립에도 관여했으나, 미군정의 탄압과 1946년 9월 체포령으로 지하로 잠입해야 했다. 10월 인민항쟁(대구 10·1 사태) 이후 그의 조직은 총파업을 주도했고, 11월에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을 통합해 남조선로동당을 출범시켰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월북하여 남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해방 3년 동안 박헌영은 미군정하 남한 좌익 진영의 실질적 최고 지도자였다.

1953~1955년 숙청과 '간첩 사건'

한국전쟁 정전 직후인 1953년 8월 3일, 박헌영은 내무성에 체포되었다. 표면적 혐의는 '미제 간첩'이었다. 1939년 서울에서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만나 독립운동 지원을 논의한 것이 14년 뒤 간첩죄의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남조선로동당 출신 인사들에게 전가하려는 김일성의 정치적 숙청이었다. 1955년 12월 15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며칠 뒤 처형되었다. 내무상 방학세가 직접 방아쇠를 당겼다는 증언이 있다. 이 숙청으로 남로당계 인사들은 대거 제거되었고, 박헌영은 이후 조선 역사에서 '반당적·반혁명적 분자'로 지워졌다. 소련과 중국은 김일성에게 집행을 만류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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