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맨 리버'를 투쟁의 찬가로 바꾼 예술가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올 맨 리버〉의 체념적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 우는 대신에 / 나는 계속 싸워야 한다 / 죽는 그날까지." 웨일스에서 "예술가는 편을 들어야 한다. 나는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세계적 베이스-바리톤이자 배우로 〈올 맨 리버〉와 《오셀로》로 정상의 예술가에 오르면서도, 그 예술을 흑인 해방운동과 국제 반식민주의 투쟁에 바친 사회주의자. 스페인 공화파와 1949년 파리 평화대회를 지지한 뒤 소련 지지를 철회하지 않아 매카시 시대 여권 박탈과 블랙리스트를 겪었지만, 1958년 대법원 판결로 여권을 되찾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5–1919러트거스대학, 미식축구 올아메리칸 2회, 졸업생 대표
- 1919–1923컬럼비아 로스쿨, NFL 선수 활동
- 1924–1928《황제 존스》 등 주연, 할렘 르네상스 스타로 부상
- 1928–1939런던 《쇼 보트》로 세계적 명성, 《오셀로》(1930)로 영국 첫 흑인 오셀로
- 1934첫 소련 방문 — "처음으로 흑인이 아니라 한 인간이다"
- 1937–1939스페인 공화파 지지, 국제여단 방문, 아프리카문제위원회 활동
- 1943–1945브로드웨이 《오셀로》 — 백인 출연진과 첫 흑인 오셀로, 296회 공연
- 1949파리 평화대회 연설 후 피크스킬 폭동, 블랙리스트 시작
- 1950–1958여권 박탈, HUAC 조사, 《프리덤》 창간, 스탈린 평화상(1952)
- 1958대법원 판결로 여권 회복, 《Here I Stand》 출간
- 1958–1960유럽·소련·호주·뉴질랜드 순회공연, 《오셀로》 출연
- 1961–1963건강 악화, 동베를린 부흐 클리닉에서 회복
- 1963–1976은둔 생활, 필라델피아에서 뇌졸중 합병증으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반식민주의 국제주의와 아프리카 문제 위원회
로브슨의 정치 활동은 흑인 해방을 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의 한 축으로 보는 국제주의에서 비롯했다. 1937년 맥스 예르간과 함께 '아프리카 문제 국제위원회'를 설립한 이래, 후신인 아프리카 문제 위원회(CAA)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그는 '미국인에게 아프리카에 관한 진실을 제공'하는 것을 조직의 상임 과제로 삼았다. CAA는 월간 「아프리카에 스포트라이트」를 발행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말란 정권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는 투쟁에 구호금을 보내는 등 미국에서 아프리카 독립운동을 위한 실질적 채널로 기능했다. 1949년 W. E. B. 듀보이스가 의장으로 합류하고 알패우스 헌턴이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CAA는 특히 남아프리카와 케냐의 식민 착취를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국제주의는 국내 투쟁과 맞물렸다. 1946년 로브슨은 린치 반대 미국 십자군을 창설했고, 1951년에는 윌리엄 패터슨과 함께 시민권 의회의 청원서 《우리는 집단학살을 고발한다》를 유엔에 제출하여, 린치에 대한 연방정부의 방치가 집단학살 협약상의 집단학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의 항일가 '의용군 행진곡'을 녹음하고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 지원을 반대했으며,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핵무기 위협을 규탄했다. CAA와 시민권 의회가 1947년 법무장관의 전복조직 명단에 오르면서 이 국제주의는 냉전 국가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다. FBI는 CAA를 '공산당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조직으로 간주하고 그 지부를 감시했으며, 로브슨의 여권 박탈은 그가 아프리카 식민 민족의 독립을 대변하는 것을 봉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