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 사령관에서 옐친의 국방장관으로, 쿠데타의 열쇠를 쥔 인물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81–1983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65–1969랴잔 고등공수지휘학교 졸업 (금메달)
- 1981–1983, 1985–1988아프가니스탄: 345공수연대장 → 103공수사단장
- 1988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90.12–1991.08소련 공수군 총사령관
- 1991.08–1992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92.05–1996.06러시아 연방 국방장관
- 1997–2007로스보루제니예·로소보론엑스포르트 군사 고문
관련 역사 사건
러시아군 건설과 군 개혁의 공백
그라초프가 1992년 5월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이 된 시점은 소련군이 해체되고 러시아 영토 밖에 주둔한 부대들의 운명이 걸린 국면이었다. 같은 해 5월 7일 옐친의 명령으로 러시아 국방부가 수립되고 러시아 지상군이 창설되었으며, 동시에 동독·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몽골 주둔 부대에서 수만 명의 병력이 철수하고 있었다. 같은 날 그라초프는 러시아 연방군에 대한 직접 지휘권을 넘겨받고 러시아 최초의 대장 계급을 받아, 44세로 당시 가장 젊은 대장이 되었다. 그는 참모진의 다수를 아프가니스탄에서 함께 복무한 장성들로 채웠다.
군 개혁 논쟁에서 그는 구소련식 대규모 상비군 구조를 유지하려 했고, 이 점에서 급진적 군 개혁을 요구한 '젊은 개혁파'와 충돌했다. 발트해 연안·자카프카스·중앙아시아에 주둔한 러시아 부대의 신속한 철수를 반대했는데, 군인과 가족의 주거 등 사회·생활 문제를 해결할 자원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편으로는 군 내 정치화를 막겠다며 전러시아 장교회의와 군인 독립노조 등 정치화된 군 조직을 금지했다. 지휘 일원화를 지키려는 이 조치들은 그가 내세운 '군은 내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내부 긴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기 개혁은 실제로는 거의 진척되지 못했다. 1992년 7월 21일 《크라스나야 즈베즈다》에 개혁안이 발표되었지만 '공론에 부응하려 급조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총참모부는 보수주의의 보루가 되었다. 개혁이 좌초한 이유로는 확고한 민간의 정치적 지도력 부재, 즉 옐친이 군의 개혁보다 통제와 충성을 우선한 점이 꼽힌다. 옛 바르샤바 조약국과 발트해 연안에서의 철수는 막대한 비용과 혼란을 낳았고, 돌아온 부대를 수용할 주거 시설조차 부족해 병력과 장비가 '빈 들판에 하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라초프의 국방장관기는 이렇게 '군대를 지켰다'는 평가와 '개혁을 막았다'는 비판이 첨예하게 맞서는 시기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