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민주당(카데트)의 지도자: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1916년 11월 두마 연단에서 그는 정부의 실패를 하나하나 열거한 뒤 매번 같은 후렴구를 던졌고, 의원들은 "반역이다!"라고 외쳐 답했다.
입헌민주당(카데트) 지도자이자 역사가. 1916년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로 차르 체제를 뒤흔들었고, 외무장관 시절 4월 위기를 촉발했다. 망명 후 파리에서 신문을 발행했으며, 대독소전 때 소련 편에 섰다.
경력 연표
- 1905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 1906비보르크 선언 기초 — 의회 해산에 대한 저항 촉구
- 1907–1917제3·4대 두마 의원, 카데트 원내대표
- 1915진보블록(Progressive Bloc) 결성 주도
- 1916.11'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 — 슈튀르메르 정부 맹비판
- 1917.3–5임시정부 외무장관 — 밀류코프 비망록으로 4월 위기 촉발 후 사임
- 1917.8코르닐로프 사건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대립 속 혼란 가중
- 1920–1940파리에서 망명 신문 『최신소식』 발행
- 1941–1943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 지지 —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기뻐함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카데트당 창당
- 1917.02–072월 혁명두마 임시위원회 위원이자 임시정부의 입헌민주당 지도자2월 27일 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각료회의 활동 종료 후 임시위원회가 수도의 권력을 장악하도록 주도했다. 초대 임시정부에서 외무장관으로 입각했으며, 혁명 후에도 입헌군주제를 옹호했으나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4월 각서로 임시정부 첫 위기를 촉발한 외무장관입헌민주당 지도자로서 임시정부 외무장관에 취임했으나, 전쟁 목표를 재확인한 4월 각서로 대규모 시위를 유발했다. 이 사건은 임시정부의 첫 위기였으며 혁명으로 가는 분기점이었다.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 1916년 11월 두마 연설
1916년 가을, 러시아는 전쟁 3년차에 접어들며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군수물자 부족, 식량난, 철도 수송 마비가 겹친 가운데, 황실에서는 독일 출신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국정에 깊숙이 개입한다는 소문이 만연했다. 밀류코프는 진보블록 내에서 보리스 슈튀르메르 총리(라스푸틴의 측근으로 여겨지던 인물)에 대한 공개 공격을 주장했다. 블록 내 좌파는 정부 전체를 '반역'으로 규정하자고 요구했고, 우파는 그러한 발언이 두마 해산을 초래할 위험을 경고했다. 밀류코프는 중간 노선을 택해 슈튀르메르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11월 1일(구력), 2월 이후 처음 소집된 제4대 두마에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먼저 연단에 올라 각료들을 '고용 살인자'라고 부르며 즉각 퇴장 명령을 받았다. 이어 밀류코프가 케렌스키보다 세 배는 긴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암흑 세력'과 '독일을 위한 투쟁'을 언급하며, 전쟁 물자 조달 실패, 수호믈리노프 전 장관의 부패 사건, 슈튀르메르 비서 이반 마누일로프-마나세비치의 독일 뇌물 수수 의혹 등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리고 매번 같은 후렴구를 던졌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까, 아니면 반역입니까?" (Глупость или измена?). 의원들은 "어리석음이다!" 혹은 "반역이다!"라고 외쳐 답했고, 밀류코프는 "어느 쪽을 택하든 결과는 같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연설의 결정적 순간은 독일어로 인용한 구절이었다. 밀류코프는 오스트리아 신문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의 한 대목을 낭독하며, 이 신문이 황후 측근들의 활동을 '젊은 황후를 둘러싼 궁정 당파의 승리'라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의장이 독일어를 몰랐기에 제지하지 못했지만, 의원들은 이것이 황후를 직접 겨냥한 것임을 즉시 알아챘다. 연설은 검열로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필사본으로 전국에 퍼졌고, 원문에는 없던 황후 스파이 의혹까지 덧붙여졌다.
파장은 즉각적이었다. 조지 뷰캐넌 영국 대사는 밀류코프를 대사관으로 피신시켰고, 슈튀르메르와 프로토포포프 내무장관은 두마 해산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황후는 니콜라이 2세에게 편지를 보내 밀류코프, 알렉산드르 구치코프, 르보프 공작, 알렉세이 폴리바노프를 시베리아로 추방하라고 권했다. 연설 직후 슈튀르메르는 사임했고, 이 연설은 라스푸틴 암살(한 달 뒤)과 2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길에 이정표가 되었다. 밀류코프 자신은 훗날 회고록에서 청중이 자신이 확신하지 못했던 대목에서조차 단호히 '반역이다!'라고 답했다고 인정했다. 수많은 위조문서와 음모론이 이 연설을 '의도적 혁명 선동'으로 규정하려 했으나, 밀류코프는 생애 끝까지 자신이 혁명의 조직자가 아니며 단지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폭로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