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주의 철학 정통을 세우고 말년에 소련 문화사의 토대를 잉태한 철학자 외교관
「유딘과 미틴은 하늘의 별을 딸 재목은 아니지만, 기술적으로는 일을 잘 안다」 — 스탈린, 두 철학자를 평가하며
1930년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를 숙청한 철학자.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하고 주중 대사로 중소 분열을 목격했다. 말년에 비정통파 문화사학자들을 보호해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경력 연표
- 1899니제고로드 현 아프락시노 촌락 빈농 가정 출생, 1912년 니즈니노브고로드로 이주하여 선반공 견습
- 1918–1921붉은 군대 지원 입대, 콜차크군과 교전. RKP(b) 입당(1918.10), 정치지도원에서 제57소총사단 연대 정치위원까지 승진
- 1921–1931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1924), 니제고로드 현당 선전선동부장·현신문 『즈베즈다』 편집국장(1924~1927),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1931)
- 1930–1932미틴·랄체비치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새로운 과제에 대하여」(『프라우다』 1930.6.7) 발표 —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 숙청 개시
- 1932–1938적색교수양성소 소장, 『문학비평가』 주필(1933~1937),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차 대회 조직위 책임서기, 아기트프롭 부장(1934~1937)
- 1937–1947국립출판사연합(OGIZ) 소장, 1937년 「왜 RAPP를 해체해야 했는가」로 키르숀·아베르바흐 공격 — 키르숀은 이후 체포·처형됨
- 1939–1944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통신회원(1939), 『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1등급(1943), 모스크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임(1943~1948)
- 1950–1951스탈린의 개인적 지시로 베이징 파견 — 마오쩌둥 『선집』 러시아어판 편집, 중국 각지에서 정치·이론 강연. 마오와 철학·정치 대화
- 1952–1959CPSU 중앙위원(1952~1961), 당중앙 간부회의 후보위원(1952.10~1953.3). 주중 소련 대사(1953.12~1959.10) —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노선에 비협조, 중소 분열 초기 목격 후 소환
- 1960–1968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인류와 문화' 4권 기획 참여. '세계 문화사' 프로젝트 지도 — 아베린체프·구레비치·카주단 등 비정통파 학자 기용, 사후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남김
관련 역사 사건
중국 시절: 마오의 편집자에서 주중 대사까지 (1950–1959)
유딘의 중국 인연은 1950년 7월,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받은 인물'을 보내 『선집』 편집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유딘을 직접 지목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유딘은 번역팀의 작업 속도가 더뎌지자 중국 각지에서 정치·이론 강연에 나섰다. 류샤오치가 주재한 베이징 강연 개막식에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를 발표했고, 이후 산둥·난징·상하이·항저우·창사·광저우·한커우·시안·옌안·선양·하얼빈을 순회했다. 강연 초고는 『런민르바오』에 연재되었다. 귀국 직전 마오의 「실천론」 러시아어 번역을 검토했고, 외국인 독자에게 거슬릴 수 있는 표현을 일부 줄이는 데 동의를 얻었다. 스탈린은 이 글을 『볼셰비키』와 『프라우다』에 싣도록 지시했고, 1951년 소련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1953년 12월 주중 대사로 정식 부임한 유딘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노선에 비협조적 태도를 보이며 마오와의 관계를 중시했다. 1957년 마오는 유딘에게 '모스크바 회의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유딘은 이 메시지를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그러나 1959년 중소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자 흐루쇼프는 유딘을 소환했다. 훗날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유딘이 마오를 자극해 반소 인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고, 장기간의 철학 대화를 통해 유딘을 신뢰했던 마오 역시 그의 소환을 중소 갈등의 전조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