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경력 연표
- 1923타이위안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산시성 창립 당원
- 1929–1935베이징·톈진에서 투옥, 옥중에서도 지하활동 지속
- 1937–1941화북국 조직부장 겸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경구 서기
- 1941–1944중앙당교 부교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당교 숙청 주도
- 1945정치국원 선출; 동북국 서기 파견 — 1946년 군사적 패배로 해임
- 1951–1966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
- 19665인 소조 조장, 「2월 강요」 기초; 5월 회의에서 숙청, 문화대혁명 개막
- 1979–1988전인대 법제위 주임, 중앙정법위 서기;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