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전

彭真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2–1997 ○ 혈액암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펑뤄루양」 사건과 10년의 구금

1966년 봄의 실각은 개별 처벌이 아니라 당 내부의 숙청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5월 4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중공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는 펑전과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을 비판 대상으로 삼았는데, 펑전에게 돌린 죄목의 핵심은 그가 「2월 강요」를 주도하고 우한의 『해서파관』 비판을 저지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를 '당내 폭군'이라 부르며 '학계 폭군' 우한을 보호했다고 비난했고, 그의 하야는 마오쩌둥이 류사오치 일파를 반격하는 '전초전'으로 해석되었다. 5월 24일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네 사람을 '반당집단'으로 규정하는 전담 심사위원회를 설치했고, 펑전은 중앙서기처 서기 직무가 정지되고 베이징시 당위 제1서기와 시장직에서 해임된 뒤 '특무'로 몰렸다. 5월 16일에 통과된 「오일육 통지」는 그를 지명 비판하면서 「2월 강요」와 문화혁명 5인 소조의 폐지를 선언했고, 5인 소조를 대체한 중앙문화혁명소조가 그 권한을 넘겨받았다. 이 사건은 문화대혁명 시기 린뱌오가 조작한 첫 내부 숙청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해 12월 펑전은 예샹전, 류스쿤 등 홍위병에게 끌려가 구금되었다. 1975년 5월 19일에는 베이징에서 산시성 상셴으로 이송되었으나 여전히 자유가 제한된 상태였다. 구금 기간에 고향인 산시성 허우마의 마을도 습격을 받아 85세의 어머니와 동생이 투쟁 과정에서 사망했고, 조카는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부인 장제칭도 함께 투옥되었다가 1975년 풀려나 산시성 상뤄로 유배되었고, 두 사람은 1978년 말에야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펑전은 1978년 12월 28일 중공 11기 3중전회가 끝난 뒤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1979년 2월 17일 중공 중앙은 그에게 씌워진 모든 죄명과 날조된 모함을 취소한다는 평반 통지를 발표했다. 10여 년의 구금과 문화대혁명이 중국 정치에 남긴 결과에 대한 고민은 그가 이후 법치 제도 건설에 나서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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