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무장봉기의 작전사령관, 혁명 뒤엔 뒷방으로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경력 연표
- 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 1906–1916망명·지하출판; 『즈베즈다』·『프라우다』 창간 참여; 중앙위 러시아국 뷰로 재무위원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군사조직 책임자; 군인신문 편집; 적위대 조직
- 1917.10VRK 작전트로이카 위원·부의장; 무장봉기·겨울궁전 습격 현장 지휘
- 1917.11–1918.3초대 군사인민위원; 적군 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의장
- 1918–1919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
- 1920–1927스포르틴테른 의장·최고체육평의회 의장 — 혁명가에서 체육행정가로
- 1935–1948개인연금자; 회고록 집필·선전활동; 1941년 모스크바 방어 참호 자원
관련 역사 사건
1917년 11월 7일, 군사혁명위원회의 작전 지휘자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체르니고프 지방의 사제 아들로 신학교에서 혁명으로 걸어 나온 조직가였다. 1917년 그는 볼셰비키 군사조직(보옌카)을 이끌며 수비대 병사들을 당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봉기의 날인 1917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포드보이스키는 안토노프-옵세옌코, 추드놉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작전을 지휘하는 3인 지휘부를 이루었다. 다리와 전신국, 역 들을 차례로 접수하는 계획은 거의 유혈 없이 집행되었고, 이튿날 새벽 궁전이 함락되었다. 그는 훗날 이 날들을 상세한 회고록으로 남겼고,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10월』(1927)에는 자기 자신의 역으로 출연했다.
전 인민을 단련하라, 브세보부치에서 스파르타키아다까지
10월 이후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11월부터 1918년 3월까지 군사인민위원으로서 낡은 군대의 해체와 적군 창설의 첫걸음을 이끌었다. 1918년 봄부터는 보편군사훈련국(브세보부치)의 책임자로서 노동자와 청년 수백만 명에게 기초 군사훈련과 체력 단련을 조직했고, 이 사업은 내전 승리의 보이지 않는 기반이 되었다.
내전이 끝나자 그는 군사훈련의 유산을 대중 체육 운동으로 전환하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 적색스포츠인터내셔널의 의장으로서 노동자 스포츠의 국제 조직을 이끌었고,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스파르타키아다를 조직했다. 부르주아 올림픽에 맞선 이 노동자 체전에는 소련 전역과 해외에서 온 노동자 선수 수천 명이 참가했다. 그는 대숙청에서 살아남아 1948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