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바시 출신으로 24년간 소련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대제'
1953년 3월, 베리야가 항공공업성을 국방공업성에 통합하면서 데멘티예프는 자리를 잃었다. 8월 베리야가 체포되자마자 그는 항공공업 장관으로 복귀했고, 이후 24년간 소련 항공산업을 지휘했다.
추바시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로 시작해 소련 항공공업을 거의 24년간(1953~1977) 이끈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전투기 대량 생산을 총괄했고, 종전 후 장관으로서 MiG 전투기에서 Tu-144 초음속 여객기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용·민간 항공기 생산 전반을 지휘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에 걸쳐 항공산업을 관장한 유일한 인물로, 설계자들 사이에서는 '표트르 대제'로 불렸다.
경력 연표
- 1922–1927공장 노동자, 심비르스크 직업기술학교 졸업
- 1927–1931모스크바 기계연구소 →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31–1934민간항공함대 연구소 선임기사·운용기술부장
- 1934–1941모스크바 제81·제1항공공장 작업반장 → 주임기사 → 공장장
- 1941–1953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제1부장관) — 전시 항공기 대량생산 총괄, 사회주의노동영웅(1941)
- 1953–1977소련 항공공업 장관 — 제트기 전환·Tu-144·Il-76·Il-86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 재수훈(1977)
관련 역사 사건
'표트르 대제'의 통치술
데멘티예프는 소련 관료제에서 보기 드문 유형의 산업 지도자였다. 공장 노동자로 시작해 정비공·기사·공장장을 거쳐 장관에 오른 그는 항공산업의 기술적 세부를 몸으로 익혔고, 각 공장의 핵심 작업자 이름까지 기억하는 경이로운 기억력을 지녔다. 그의 좌우명은 "인생에 불가능을 요구하라—그러면 최대치를 얻는다"였다.
그는 권위주의적 스타일로 부처를 이끌었다. 정부가 임명한 차관이나 국장들보다 자신이 직접 발탁한 수석기사들을 신뢰했으며, 이들이 실질적인 기술 정책을 결정하게 했다. 보리스 체르톡의 회고에 따르면, 데멘티예프의 결정은 사실상 누구도 뒤집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가혹할 정도로 요구가 많았으나, 결과를 낸 이들에게는 후했다. 항공기 24대를 격납고 하나에 넣어야 했던 어느 야전비행장의 고비에서, 그는 작업반장이 1만 루블을 요구하자 단박에 건넸고, 그 일화는 항공공업계 전체에 회자되며 그의 권위를 더욱 높였다.
설계자들 사이에서는 '표트르 대제'(Пётр Великий)로 불렸다. 세르게이 일류신, 안드레이 투폴레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같은 거장들조차 그와 직접 부딪쳐야 했다. 일류신과는 거의 우정에 가까운 관계였지만, Il-62의 초도비행 일정을 두고 데멘티예프가 압박하자 일류신은 연말 보고를 포기하고서라도 추가 점검을 고집했다. 겐리흐 노보질로프는 그를 두고 "수백 개 면이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아서, 누구도 그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었다"고 평했다. 냉혹하면서도 다정하고, 아첨할 줄도 알면서 단칼에 잘라낼 줄도 알았던 인물. 그것이 24년간 소련 항공산업을 지배한 데멘티예프의 통치술이었다.